막센티우스 바실리카야말로 제정 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기원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완공된 이 바실리카는 황제의 집무실, 응접실 정도로 사용되었다. 비록 콘스탄틴 황제가 오늘날의 이스탄불 자리에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제 2의 로마"를 짓도록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로마의, 막센티우스 시절 착공된 이 거대한 건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오늘날 모습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319498
가로 세로 100 x 65 미터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건축학적 특징은 궁륭이다. 궁륭은 비너스 로마 신전에서 이미 이야기했던 건축 기법 중 하나이다. 후기 공화정 시대에서부터 일부 부유층의 지하 묘지에 궁륭이 사용되었는데,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고 공화정 시대에서 제정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규모 공공 시설이 건설되자 궁륭은 도시 곳곳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앞서 언급했던 판테온을 말할 수 있다. 축구공 모양의 원형 건물을 내부 기둥 없이 넓직하게 짓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궁륭 기법이 필수적이었다. 또 다른 예들로는 네로 황제가 지었다는 황금 궁전 golden palace 내부, 실용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공공 목욕탕의 주요 공간을 들 수 있다. 가로 세로 20미터가 넘는 공간을 볼륨감 있게, 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유일한 기법이 궁륭이었는데, 비너스 로마 신전이 막센티우스에 의해 개보수될 당시 궁륭이 사용되었던 것처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부에서도 교차 궁륭 (서양 고딕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방식)과 터널 궁륭 (맥주캔을 누워 반으로 자를 때 만들어지는 궁륭)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넓직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판테온 내부에서 볼 수 있듯, 그리고 비너스 로마 신전 내 신상이 안치된 곳에서 볼 수 있듯 건축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어떤 극적인 효과를 의도했다. 궁륭 내부 표면의 음각과 양각의 반복됨,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는 돌출이나 패임 등이 판매온 내부에서 맨 꼭대기 열려진 부분 (라틴어로는 오쿨루스라고 부른다)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과 어우려져 음영의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부, 특히 35미터 높이의바실리카 중간 영역에서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복원도. 정중앙열의 교차 궁륭과 측면열의 터널 궁륭을 비교해볼 수 있고 채광을 위한 수많은 창틀들이 측면과 상단부에 자라잡고 있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319519
수백평방미터나 되는 이 대건축물이 어떻게 채광되었을까? 서양 중세 교회에서 측면과 정면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사용되었던 사례를 우리는 일단 생각해볼 수 있다. 너무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밝지도 않은 그 중간쯤이야말로 신의 거처라 정의내릴 수 있는 성당에 어울리는 채광 방식이었다. 서양 중세를 거슬러 올라가 서양 고대 시대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자들에 의해 기원후 1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퍼져나갔다고 여겨지는 유리 제조 기술이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에도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에서도 측면의 직사각형 공간을 유리 (오늘날의 투명 유리라기보다는 불투명한 간유리 형태의)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면의 출입구를 열었을 때 쏟아져들어오는 빛이 측면 유리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과 혼합되어 신성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정면의 출입구 맞은편에 황제 막센티우스 본인이 (혹은 막센티우스의 조각상이나 막센티우스의 수호신 조각상이) 앉아 있을 테고 그 주위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볼 때 전기로 인한 채광에 익숙한 21세기 우리와는 전혀 다른 건축 미학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하나의 건물이 기능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고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는 점, 이를 통해 건물과 건물 내부의 인간 사이의 상응 correspondance 작용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궁륭 안쪽. 안쪽 부분을 밋밋하게 놔두지 않고 오목 패이게끔 만들어 리듬감과 음영감이 살아나도록 했다. 기둥 아래 부분에 옴폭 패인 부분에는 신상, 예를 들어 아폴로 신상 같은 장식물들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319511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는 로마에 상주하는 황제를 위한, 황제에 의한 공공 건물이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이후 로마 시내에 더 이상 새로운 공공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았다. 왜 그러했을까? 좁은 로마 시내에 땅을 사고 그 위에 대규모 건물을 지으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는데, 최고 권력자 아니고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건물을 짓기 위한 명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콘스탄틴 개선물에서처럼 대의 명분 (전쟁에서의 승리, 공공의 안녕과 행복, 황실의 평화 등등)을 내세울 여지가 없었다. 설사 그런 명분들이 존재했다고 한들 최고 권력자가 굳이 로마 중심가에 그것을 건축물로서 영원시할 이유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몇몇 지중해 신층 대도시 내에서 수도 로마와는 전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여지가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막센티우스 이후 로마는 건축사적인 동면에 들어섰다. 기존 건물에 대한 개보수가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중소 규모의 기념상이나 공공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공공 건축물들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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