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4일 금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2.3.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안 황제는 이탈리아 본토보다는 속주에 더 신경을 썼던 황제였다. 하도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기에 그는 쉴 새 없이 떠도는 떠돌이 황제라고 불리웠다. 더군다나 그는 그리스 문화에 흥미를 가졌다. 물론 그 이전 황제들도, 예를 들어 네로 같은 황제는 직접 사륜 마차를 몰고 경주에 참가했고 그리스 본토에서 열린 디오니소스 축제에 월계관을 쓰고 리라를 튕기기까지 했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황제들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체제 안정을 위한 방편이었다. 하드리안 황제 역시 체제 안정을 최우선시하였지만 그는 좀 더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습득하려 했다.


사진 : 하드리안

출처 http://arachne.uni-koeln.de/arachne3/arachne/index.php?view[section]=uebersicht&view[layout]=marbilderbestand_item&view[caller][project]=&view[page]=95&view[category]=overview&search[data]=ALL&search[mode]=meta&search[match]=similar&view[active_tab]=overview&search[constraints]=hadrian#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스가 로마의 속주가 된지 거의 20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1-2세기 동안 지중해 전역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그리스 문화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여러 문화와 혼합되어 존재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귀족들은 (그 귀족들 내부에서 황제가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고유의 문화를 고수하였다. 돈 많은 신층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이탈리아 고유 문화와는 다른 문화에 영향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리를 두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드리안 황제의 친 그리스 성향은 독특하다고 정의내리 수 있다.


하드리안 시절의 비너스 로마 신전 평면도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784

(이열의 기둥들이 신상을 안치하는 공간 외부를 둘러싸고 있고, 삼열의 기둥들이 신전  출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두 명의 신을 모시는 것에 걸맞게 신전은 이등분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벽면과 연결된 작은 기둥들이다. 이 기둥들 덕분에 천정의 너비가 짧아져 천정을 올리는 데 구조적 위험을 감소되었다)


수도 로마 중심부, 콜로세움 부근에 하드리안 황제는 두 명의 신을 섬기는 신전을 지었다. 이 신전의 이름은 비너스 로마 신전이다. 기원후 141년 하드리안의 후임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에 의해 완공된 이 신전은 서쪽에는 로마, 동쪽에는 비너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운을 가져자주는 비너스 펠릭스 venus felix)의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크기는 어떠한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성스러운 경계 - 그리스어로 테메노스temenos라고 한다-에는 두 줄의 기둥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이 성소 경계의 크기가 무려 114미터와 100미터에 달한다. 신상이 안치된 곳의 크기는 대략 100미터와 53미터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신전을 짓기 위해 하드리안은 네로가 로마 한 가운데 지었다는 황금 궁전, 이름하여 도무스 아루레아 domus aurea 일부를 허물었고, 또한 네로가 세웠다는 거대 신상을 비너스 로마 신전 자리에서 오늘날 콜로세움 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거대한 신상을 의미하는 단어가 콜로서스 colossus인데, 콜로세움은 바로 거대 신상이 세워진 곳이라는 의미이다)

하드리안이 지었다고 여겨지는 이 비너스 로마 신전은 일반적인 이탈리아 고유의 신전과는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여타 이탈리아 신전처럼 높은 기단 위에 본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비너스 로마 신전이 어떠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기원후 307년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비너스 로마 신전을 보수했던 이가 막센티우스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신전 일부는 기원후 4세기 초반 막센티우스에 의해 보수 개축된 것이다.


1850년대 발굴 당시 그려졌던,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 평면도.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을 하드리안 시절의 신전과 비교해보면, 일단 신전 외부의 기둥들이 절반 정도 사라졌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신상이 모셔지는 공간이 1/3 정도 축소되었으며, 신전의 핵심 공간이 반원 형태의 신상 거치대와 원통 절반 형태의 궁륭으로 이루어진 천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Tempel_der_Venus_und_der_Roma#/media/File:Temple_of_Venus_and_Roma_-_groundplan.jpg


주의해야 할 사실은, 하드리안 당시 평편한 천정이었던 것이 막센티우스의 개보수로 인해 궁륭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궁륭이란 무엇일까? 천정을 올리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아주 긴 널판지나 석재를 올리면 되는 것. 단 이런 공법의 약점은 건물 내부에 하염없이 많은 기둥을 세울 수 없다는 점이다. 건물 내부에 수십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친다면 내부 공간의 이용에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이 때 필요한 공법이 궁륭이다. 궁륭은 공화정 후기 로마 건축가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중부 이탈리아에 공간 내부를 궁륭으로 떠받들었던 공화정 후기 무덤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공륭이 공공 건물에 대규모적으로 사용된 때는 제정 초기였다. 황제나 귀족들에 의해 공공 건물이 발주 시행되었는데 가로 세로 30미터 정도 되는 (예를 들어) 대규모 건물 천정을 얹지는 데 궁륭 공법이 애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우구스투스 시절 만들어졌고 하드리안 시절 개보수된 판테온을 들 수 있다. 판테온의 지름은 무려 50미터에 달하는데 이 너비의 내부를 수십개의 기둥이 받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콜로세움 쪽에서 본,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
동그렇게 남은 신상 거치대 천정과 그 안에 새겨진 양각과 음각 형태의 조형물을 살펴보자.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3857




하지만 석굴암에서 보면 알 수 있듯 궁륭 자체를 사용하는 것은 건축 공법의 효율성과는 별도로 어떤 효과를 주는 의도도 존재한다. 남아 있는 비너스 로마 신전 천정을 살펴보면, 그리고 그 아래에 안치되었을 비너스 신상을 상상해보면, 경건함이 절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궁륭 표면이 마름모꼴 형태로 조작되어 있어 (판테온과 유사하게), 정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외부 빛으로 인한 밝음과 어두움 현상이 연출될 수 밖에 없다. 맥주 깡통을 눕혀 횡으로 절단하였을 때 남겨지는, 절반으로 잘려진 맥주 캔이 천정에 올려져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내부가 마름모꼴 혹은 직사각형 형태로 나뉘어져 있고 움푹 패여져 있다고 상상해보면 이 거대한 신전이 기원후 4세기의 미적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을 알게 된다.

2015년 7월 15일 수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2.2.

포룸 로마눔은 수도 로마의 위상 저하를 어떻게 경험하였을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으로부터 선물 받은 개선문은 사실 공화정 시대때부터 기념물과 개선문들이 지어졌던 포룸 로마눔 너머, 다시 말해 포룸 로마눔 바깥에 세워졌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 세대인 디오클레치안 황제는 5개의 기둥을 포룸 로마눔 안쪽 로스트라 (연단) 뒤쪽에 줄지워 세웠다. 디오클레치안이 본인 자신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의해 포룸 로마눔을 활용한 경우라면, 콘스탄티누스는 본인의 의지가 그다지 반영되지 않은, 신민의 뜻에 의해 포룸 로마눔이 활용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디오클레치안과 콘스탄티누스 사이에 막센티우스라는 이가 존재하며, 그야말로 포룸 로마눔 -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의 포룸 로마눔, 다시 말해 공화정 시대 포룸 로마눔 경계를 훨씬 넘어선 공간을 말한다 - 을 마지막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막센티우스가 죽은 후 포룸 로마눔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제외하고) 변변한 기념물이나 대형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서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더 이상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을 만한 땅이 포룸 로마눔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귀족, 황제들이 굳이 기존의 건물을 허물어서 그 위에 새 건물을 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포룸 로마눔 이외의 공공 장소가 많았기에 굳이 포룸 로마눔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로마 이외의 도시들이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비좁은 포룸 로마눔에 기념물이나 대형 건물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기원후 7세기 초반에 세워진 포카스 기둥이다. 비잔틴 제국 황제가 포룸 로마눔에 기념 조형물을 세웠던 배경에는 기원후 6세기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안이 벌였던 서로마 제국 영역 탈환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이후, 기독교 중심지로서의 로마, 로마에 상주하는 교황에 대한 경건함을 표현하려는 의도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수도 로마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만천하에 알리려는 의도가 존재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막센티우스는 수도 로마에 근거한 이탈리아 마지막 권력자였다. 여기에서 그를 권력자라고 한정짓는 이유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단 한번도 황제라는 칭호를 공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치안과 함께 대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렸던 막시미니안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군사적 정치적 능력을 전혀 검증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둔 귀족들과 로마 방위군단병의 후원을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렇지만 테트라키 시대 이후 대소황제로 활약하고 있던 이들에게 수차례 무시당했고 - 왜냐하면 그에게 황제 칭호가 내려질 경우 디오클레치안이 만들었던 대소 황제 체제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일종의 반란 수괴 정도로 치부되었다.두 차례에 걸친 막센티우스 진압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마자 기원후 312년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권력을 확립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예 라인 주둔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다. 막센티우스와의 일전은 로마 북부 밀비안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투 중 막센티우스는 전사하고 만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Maxentius#/media/File:129_Maxentius.jpg (막센티우스가 주조했던 동전)

10년도 안 되는 집권 기간 동안, 이탈리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했던 그가 남긴 족적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로마 외곽에 디오클레치안의 퇴임 궁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주지를 지었는데, 경마장과 자신과 자신 가족이 묻힐 가족 묘지, 그리고 궁전으로 이루어진 막센티우스 빌라는 기원후 3-4세기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공간 속에서 생활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물들이 바로 비너스 - 로마 신전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이다.



막센티우스 빌라에 속한 경마장 일부분. 영어판 위키피티아를 보면 카라칼라 황제의 경마장을 막센티우스 빌라 내 경마장으로 소개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직까지 막센티우스 빌라 부근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Maxentiusvilla#/media/File:Rome-CircusofMaxentius.JPG




혹자는 기원후 309년에 사망한 막센티우스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만을 위한 무덤이라고 보지만, 아마도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포함한 막센티우스 가족 묘지로 사용되기 위해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4431172

2015년 7월 14일 화요일

Vitruvius, de archtectura. translation from latin to korean, 제 1 권 제 1 - 4 장


Book I

 제 1 권

1. Architecti est scientia pluribus disciplinis et variis eruditionibus ornata, cuius indicio probantur omnia quae ab ceteris artibus perficiuntur opera. ea nascitur ex fabrica et ratiocinatione. fabrica est continuata ac trita usus meditatio, qua manibus perficitur e materia cuiuscumque generis opus est ad propositum deformationis. ratiocinatio autem est quae res fabricatas sollertia, ratione proportionis demonstrare atque explicare potest.

1. 건축은 여러 학문들과 다양한 배움에 의해 풍성해지는 학문이다. 학문과 배움에 의해 다른 수공업적 행위들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건축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이 형성된다. 그리고 가치 판단은 건축가로서 행하는 실천과 심사숙고에서부터 파생된다. 건축가로서 행하는 실천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유 속에서 제안된 설계도에 따라 건축 자재가 사용되는 건설 과정 또는 단순 수작업을 지칭한다. 반면 이론은 지어진 건물을 합리적인 관계 속에서 알려주고 설명하는 것이다.

주 1- ars는 오늘날의 art, 예술이라 해석하기보다는 수작업, 수공업적 행위를 의미한다. 
주 2 - 수많은 건축가가 민간 그리고 공공 건물을 설계도에 따라 주어진 자재를 이용하여 지었는데, 비투르비우스는 건축가의 이러한 실천과 더불어 이론, 즉 어떤 건물을 합리적인 관계망 속에서 알려주고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 itaque architecti qui sine litteris contenderant ut manibus essent exercitati, non potuerunt efficere ut haberent pro laboribus auctoritatem, qui autem ratiocinationibus et litteris solis confisi fuerant, umbram non rem persecuti videntur. at qui utrumque perdidicerunt, uti omnibus armis ornati citius cum auctoritate quod fuit propositum sunt adsecuti.

2. 그래서 학문적 지식 없는 건물만을 짓는 건축가는 그의 노력에 상응하게 되는, 충분한 인정을 만들어낼 수 없다. 반면 심사숙고만 하고 학문적 지식만을 추구하는 그림자를 쫒아가듯 실재 있는 작업을 수행하는 데 실패한다. 그러므로 심사숙고하면서 지식과 실천을 겸비한 건축가만이,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게, 인정받는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 

주 - auctoritas는 영어 authority의 원래말이다.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권위를 말한다. 

3. cum in omnibus enim rebus, tum maxime etiam in architectura haec duo insunt, quod significatur et quod significat. significatur proposita res de qua dicitur, hanc autem significat demonstratio rationibus doctrinarum explicata. quare videtur utraque parte exercitatus esse debere qui se architectum profiteatur. itaque eum etiam ingenium oportet esse et ad disciplinam docilem. neque enim ingenium sine disciplina aut disciplina sine ingenio perfectum artificem potest efficere. et ut litteratus sit, peritus graphidos, eruditus geometria, historias complures noverit, philosophos diligenter audierit, musicam scierit, medicinae non sit ignarus, responsa iurisconsultorum noverit, astrologiam caelique rationes cognitas habeat.
 
3.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두 가지 사항, 즉 의미를 갖는 건물과 의미가 표현되는 방식을 고려하여야 한다. 의미를 갖는 건물이 앞으로 이야기될 주제인데, 건물에 대한 의미는 학문적 원리의 증명을 통해서 부여된다. 따라서 의미와 의미의 표현 방식에 익숙하지 않는 이는 건축가로 불리울 자격이 없다. 건축가는 지식을 얻는 데 재능을 갖고 있어야 하며 체질적으로 접합해야 한다. 지식 습득의 재능과 자질이 없으면 그는 완벽한 건축가가 될 수 없다. 그는 좋은 저술가가 되어야 하고 능력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고 기하학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또한 역사와 친숙하며 철학적 원리를 열심히 습득하고, 음악 원리을 알면서도 의학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법학적 지식을 새롭게 알아야 하고 천체 움직임의 원리를 알려주는 천문학까지 섭렵해야 한다.

주 - 지어진 건물 자체는 하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건물 자체는 실용적인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건물 속에는 건축가의 의도 (또는 의미)가 일정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있다 (페르디낭드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와 비슷하다). 비투르비우스는, 건물에 대한 의미는 건물을 해석하는 자가 학문적 원리를 통해 해석함으로써 명백해지며,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건축가의 원래 의도(또는 의미)에 근접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건물 속의 의미와 표출 방식을 증명함으로써 건축가의 자질 또는 소양이 점차적으로 깊어진다고 보았다. 

4. quae cur ita sint haec sunt causae. litteras architectum scire oportet, uti commentariis memoriam firmiorem efficere possit. deinde graphidos scientiam habere, quo facilius exemplaribus pictis quam velit operis speciem deformare valeat. geometria autem plura praesidia praestate architecturae, et primum ea euthygrammi et circini tradit usum, e quo maxime facilius aedificiorum in areis expediuntur descriptiones normarumque et librationum et linearum directiones. item per opticen in aedificiis ab certis regionibus caeli lumina recte ducuntur. per arithmeticen vero sumptus aedificiorum consummantur, mensurarum rationes explicantur, difficilesque symmetriarum quaestiones geometricis rationibus et methodis inveniuntur.

4. 앞서 언급한 자질 중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건축가야말로 불충분한 기억력을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해 그의 건축 경험을 기록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도면 작성법에 관한 지식은 그가 생각하는 건축을 스케치하여 손쉽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하다. 기하학 또한 건축에 도움이 된다. 
자와 콤파스를 이용하여 건축가는 최대한 신속히 건축물을 평면도 상에서 직각과 곡선, 그리고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 광학에 의해 건물 내부에 정확한 지점에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단순 계산법에 의해 건물 제작 비용이 산출될 수 있고 건물 척도가 설명될 수 있는 반면, 비례와 관련된 어려운 문제는 기하학적 생각과 방법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주 - 이탈리아 반도 폼페이에서 보여지듯, 로마 사람들은 어두운 내부 공간 속에서도 일정 공간을 선택적으로 밝게 하는 데 익숙했다. 오늘날과 달리 로마 시대 건물 내부는 창문을 통해, 그리고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채광되었고, 벽화 (또는 여타 장식들 - 조각상, 가구 등)는 내부 장식의 한 요소로써 어둠과 밝음의 대비를 더욱 극대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2015년 7월 9일 목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2.1.


디오클레치안은 기원후 305년 그의 동료 대황제 막시미니안과 함께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죽을 때까지 황제 자리에 머무르려 했던 전임 황제들과는 차별되는 행보였다. 좀 더 황제 자리에 머물 명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지명한 대, 소황제들이 제국 전역에서 활발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제국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이 자발적 황제 퇴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반암 porphyry으로 조각된 테트라키 황제 조각상. 원래는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졌지만 중세 시대 베네치아로 옮겨졌다. 각 인물들은 디오클레치안과 막시미니안, 그리고 휘하 두 명의 소황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버지 - 들을 묘사한 것인데, 군사적 제스쳐를 보여주면서도 어깨를 걸치고 있는 이 조각상은 테트라키 시대 요구되었던 단합, 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R%C3%B6mische_Tetrarchie#/media/File:Venice_%E2%80%93_The_Tetrarchs_03.jpg


테트라키 시스템을 통해 로마의 안정, 지중해의 통합을 이루려했던 디오클레치안의 바램은 충족되지 못했다. 앞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누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물리치고, 기원후 324년 리키니우스를 제압함으로써 지중해 지배의 온전한 권력을 확립할 때까지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계속되었다. 어찌보면 디오클레치안-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갈망했던, 기원후 1-2세기 경험했던 사회 통합,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을 기대했던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기원전 3세기의 혼돈을 거치면서 하나의 로마, 하나의 지중해라는 관념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디오클레치안-콘스탄티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중해는 더이상 통합될 수 없는, 원래 그대로의 다양한 모습으로 되돌가가기 시작했다.

도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의 지중해는 콘스탄티노플 건설로 마침표가 찍혀졌다.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신의 이름으로 완공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이라 불리웠던 한적한 어촌 도시를 선택하였을까? 지도를 펼쳐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 바다야말로 해상 침략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으며, 도나우 강과 발칸 반도는 북쪽의 게르만족 침입을 방어하는 데 다소나마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알프스 산맥 너머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했던 이민족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로마 사람들에게는 엄청났다). 같은 맥락에서 동쪽에 위치한 사사니안 왕국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이민족 국가)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접수하려면 오늘날의 터키를 가로질러야 하는 강행군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로마 제정 후기의 도시 개념이 그대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디오클레치안 퇴임궁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철저한 외부 방어 성벽 안에 넓다란 도로들이 일목요연하게 뻗어가고 있었고, 각 구역마다 임페리얼 포룸, 황제의 집무실과 거주지, 일반 행정 건물들, 대규모 신전 건물, 그리고 위락 시설 (경마 시설과 원형 경기장 등이 그것이다.


후기 비잔틴 시대, 즉 기원후 8-9세기 콘스탄티노플 상상 복원도. 기원전 6세기 조그만 어촌도시로 건설된 이 곳이 천년 뒤 제국의 수도로 탈바꿈하였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 비잔티움이라 불리웠던 어촌 마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자리잡았고 비잔틴 시대와 오스만 투르크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도시이자 수도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Konstantinopel#/media/File:Bizansist_touchup.jpg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노플 완공은 수도 로마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일단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수도 로마가 급전직하 망가지는 것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수도 로마는 로마 제국의 정신적 "배꼽"과도 같은 곳이었고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후에도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았다. 기원후 4세기와 5세기 지식인들이 수도 로마를  찾아와 - 17세기 내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을 찾아 지중해 동쪽으로 향한 것처럼 - 포룸 로마눔이나 임페리얼 포룸과 같은 옛 유적에 대한 경이를 표출했었다. 수도 로마가 가졌던, 기원후 4-5세기의 정신적 문화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 로마가 예전의 수도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테트라키 시대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군사 행정 도시들이 새로운 도시 개념 속에서 지어지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경제적 중심지 - 시리아의 안티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에서는 변함 없는 번영이 계속되었던 반면, 수도 로마에는 인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공 시설물들이 들어서지 않았으며 기존 건물들의 유지 보수하는 데 있어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였다는 점이다.

Vitruvius, de archtectura. translation from latin to korean, 서문

Marcus Vitruvius Pollio, de Archtectura. The Ten books on the Architecture



Liber 1

Praefacio (서문)

I. Cum divina tua mens et numen, imperator Caesar, imperio potiretur orbis terrarum invictaque virtute cunctis hostibus stratis triumpho victoriaque tua cives gloriarentur et gentes omnes subactae tuum spectarent nutum populusque Romanus et senatus liberatus timore amplissimis tuis cogitationibus consiliisque gubernaretur, non audebam, tantis occupationibus, de architectura scripta et magnis cogitationibus explicata edere, metuens ne non apto tempore interpellans subirem tui animi offensionem.

I. 당신의 신성한 지성과 의지, 대장군 카이사르, 가 세계 정복의 권리를 획득하려 분주하였던 동안, 그리고 적들이 당신의 천하무적 용맹에 쓰러진 후 당신의 전우들이 승전 행사 내내 희열을 느꼈던 동안, 주변 국가들이 당신의 손짓과 부름을 굴욕스러운 자세로 기다리는 동안, 주변국들에 대한 위험에서 해방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들이 당신의 귀한 마음과 정책에 의해 안내되기 시작하는 동안, 당신 휘하에 있으면서도 저는 좀처럼 나의 저술과 건축에 관한 심사숙고한 아이디어들을 출판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술 작업이 원치 않게 중단되어 당신의 노여움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주 1 - 여기에서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안)를 지칭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카이사르라는 명칭은 보통명사화되어 군 최고 통수권자 및 최고 권력자를 의미한다. 
주 2 - 어렴풋이나마 우리는 비투르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휘하 부대에서 복무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항목 참조)
주 3 - 군 공병대 복무 중 저술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고 있다. 

II. cum vero attenderem te non solum de vita communi omnium curam publicaeque rei constitutione habere sed etiam de opportunitate publicorum aedificiorum, ut civitas per te non solum provinciis esset aucta, verum etiam ut maiestas imperii publicorum aedificiorum egregias haberet auctoritates, non putavi praetermittendum quin primo quoque tempore de his rebus ea tibi ederem. ideo quod primum parenti tuo de eo fueram notus et eius virtutis studiosus. cum autem concilium caelestium in sedibus inmortalitatis eum dedicavisset et imperium parentis in tuam potestatem transtulisset, idem studium meum in eius memoria permanens in te contulit favorem. itaque cum M. Aurelio et P. Minidio et Gn. Cornelio ad apparationem ballistarum et scorpionum reliquorumque tormentorum refectionem fui praesto et cum eis commoda accepi. quae cum primo mihi tribuisti, recognitionem per sororis commendationem servasti.



II. 하지만 당신이 보편적인 사회 복지, 공공 질서 확립 그리고 실용적 목적의 공공 건물 건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았을 때, 그리고 국가가 당신의 정책으로 인해 속주들과 함께 풍성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공공 건물 속에서 국력의 위대함이 범접하기 힘든 권위와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았을 때, 당신 앞에 그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저작을 출판할 수 있는 첫 기회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주제로 인해 당신의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저를 중용하였고 그의 놀라운 업적을 위해 저는 모든 것을 바쳤었습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당신의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 불멸의 삶을 얻었고 당신 아버지의 권력이 당신의 손에 쥐어진 후에도 저의 헌신을 변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제가 당신을 도와주기를 바랬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푸블리우스 미니이오 그리고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와 함께 발리스타, 스코피오네, 포병 장비를 제조하고 수리하는 데 준비 채비를 갖추었고 포병 장비와 관련된 임무 수행에 대한 보답을 당신에게 얻었습니다. 당신의 최초 보답 이후 당신은 당신 누이의 추천에 의거 보답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주 1 - 비투르비우스의 건축 철학은 현실 정치 속에서 권력의 우위 관계가 건물 속에서 (특히 공공 건물 속에서) 권위 authority 로 형태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2 - 발리스타와 스코피오네는 반자동 화살 발사 장치를 지칭한다. 
주 2 - 비투르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휘하 공병대에서 복무했음과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의 후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비투르비우스의 활동 시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III. cum ergo eo beneficio essem obligatus, ut ad exitum vitae non haberem inopiae timorem, haec tibi scribere coepi quod animadverti multa te aedificavisse et nunc aedificare, reliquo quoque tempore et publicorum et privatorum aedificiorum pro amplitudine rerum gestarum ut posteris memoriae tradantur curam habiturum. conscripsi praescriptiones terminatas, ut eas attendens et ante facta et futura qualia sint opera per te posses nota habere. Namque his voluminibus aperui omnes disciplinae rationes.



III. 당신의 호의 덕분에 굶어 죽는 것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난 저는 당신을 위한 저작을 집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예전에도 지었고 지금도 여전히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당신은 민간, 공공 건물이 당신의 여타 훌륭한 업적과 더불어 후대에 전승될 수 있도록 보살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간, 공공 건물을 바라보는 당신이 현존 건물과 앞으로 지어져야 할 건물 모두의 본질에 대한 식견을 얻을 수 있도록 저는 명확한 법칙을 설정하였습니다. 앞으로 보게될 저작에서 저는 건축 예술의 모든 원리를 드러낼 것입니다. 

주 1 - 아우구스투스 때문에 퇴역 군인인 비투르비우스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축에 관한 서적을 지었다고 여겨진다. 덧붙이자면, 충성을 다한 퇴역 군인을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공화정과 제정 시대 군 지휘관의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 특히 군 지휘관이 로마 상류층이 정치 경력을 쌓을 경우 퇴역 군인들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후원 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시절 아우구스투스 휘하 30만명의 군단병이 대 부루투스, 대 안토니아스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그들은 퇴역 후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지중해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하는 강력한 지지자로 남았다. 


2015년 7월 3일 금요일

Rimbaud

SENSATION

A. Rimbaud (1854-1891)

Par les soirs bleus d'été, j'irai dans les sentiers,Picoté par les blés, fouler l'herbe menue:Rêveur, j'en sentirai la fraîcheur à mes pieds.Je laisserai le vent baigner ma tête nue!
Je ne parlerai pas, je ne penserai rien;Mais l'amour infini me montera dans l'âme,Et j'irai loin, bien loin, comme un bohémienPar la Nature,—heureux comme avec une femme.


Mars 1870. (from: www.gutenberg.org)


As you know, he is one of the best poets in the 19th century european literature.
I liked and like a lots of his poetry. This work, which was written at his age of 17, have impressed my soul and mind so strong, especially last sentence, " j'irai loin, bien loin .... heureux comme avec une femme" Why did he describe himself like happy man with woman? Did he believe when he will go through the nature alone, he - teenager - will be happy as if he had been with woman? Or Is the nature something with feminine character?  

Nobody can answer it with easy, I know. Anyway it is quite mysterious, as so far every great poet makes us so mysterious and fascin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