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하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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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스가 로마의 속주가 된지 거의 20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1-2세기 동안 지중해 전역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그리스 문화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여러 문화와 혼합되어 존재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귀족들은 (그 귀족들 내부에서 황제가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고유의 문화를 고수하였다. 돈 많은 신층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이탈리아 고유 문화와는 다른 문화에 영향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리를 두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드리안 황제의 친 그리스 성향은 독특하다고 정의내리 수 있다.
하드리안 시절의 비너스 로마 신전 평면도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784
(이열의 기둥들이 신상을 안치하는 공간 외부를 둘러싸고 있고, 삼열의 기둥들이 신전 출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두 명의 신을 모시는 것에 걸맞게 신전은 이등분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벽면과 연결된 작은 기둥들이다. 이 기둥들 덕분에 천정의 너비가 짧아져 천정을 올리는 데 구조적 위험을 감소되었다)
수도 로마 중심부, 콜로세움 부근에 하드리안 황제는 두 명의 신을 섬기는 신전을 지었다. 이 신전의 이름은 비너스 로마 신전이다. 기원후 141년 하드리안의 후임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에 의해 완공된 이 신전은 서쪽에는 로마, 동쪽에는 비너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운을 가져자주는 비너스 펠릭스 venus felix)의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크기는 어떠한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성스러운 경계 - 그리스어로 테메노스temenos라고 한다-에는 두 줄의 기둥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이 성소 경계의 크기가 무려 114미터와 100미터에 달한다. 신상이 안치된 곳의 크기는 대략 100미터와 53미터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신전을 짓기 위해 하드리안은 네로가 로마 한 가운데 지었다는 황금 궁전, 이름하여 도무스 아루레아 domus aurea 일부를 허물었고, 또한 네로가 세웠다는 거대 신상을 비너스 로마 신전 자리에서 오늘날 콜로세움 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거대한 신상을 의미하는 단어가 콜로서스 colossus인데, 콜로세움은 바로 거대 신상이 세워진 곳이라는 의미이다)
하드리안이 지었다고 여겨지는 이 비너스 로마 신전은 일반적인 이탈리아 고유의 신전과는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여타 이탈리아 신전처럼 높은 기단 위에 본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비너스 로마 신전이 어떠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기원후 307년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비너스 로마 신전을 보수했던 이가 막센티우스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신전 일부는 기원후 4세기 초반 막센티우스에 의해 보수 개축된 것이다.
1850년대 발굴 당시 그려졌던,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 평면도.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을 하드리안 시절의 신전과 비교해보면, 일단 신전 외부의 기둥들이 절반 정도 사라졌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신상이 모셔지는 공간이 1/3 정도 축소되었으며, 신전의 핵심 공간이 반원 형태의 신상 거치대와 원통 절반 형태의 궁륭으로 이루어진 천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Tempel_der_Venus_und_der_Roma#/media/File:Temple_of_Venus_and_Roma_-_groundplan.jpg
주의해야 할 사실은, 하드리안 당시 평편한 천정이었던 것이 막센티우스의 개보수로 인해 궁륭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궁륭이란 무엇일까? 천정을 올리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아주 긴 널판지나 석재를 올리면 되는 것. 단 이런 공법의 약점은 건물 내부에 하염없이 많은 기둥을 세울 수 없다는 점이다. 건물 내부에 수십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친다면 내부 공간의 이용에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이 때 필요한 공법이 궁륭이다. 궁륭은 공화정 후기 로마 건축가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중부 이탈리아에 공간 내부를 궁륭으로 떠받들었던 공화정 후기 무덤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공륭이 공공 건물에 대규모적으로 사용된 때는 제정 초기였다. 황제나 귀족들에 의해 공공 건물이 발주 시행되었는데 가로 세로 30미터 정도 되는 (예를 들어) 대규모 건물 천정을 얹지는 데 궁륭 공법이 애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우구스투스 시절 만들어졌고 하드리안 시절 개보수된 판테온을 들 수 있다. 판테온의 지름은 무려 50미터에 달하는데 이 너비의 내부를 수십개의 기둥이 받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콜로세움 쪽에서 본, 막센티우스의 비너스 로마 신전
동그렇게 남은 신상 거치대 천정과 그 안에 새겨진 양각과 음각 형태의 조형물을 살펴보자.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3857
하지만 석굴암에서 보면 알 수 있듯 궁륭 자체를 사용하는 것은 건축 공법의 효율성과는 별도로 어떤 효과를 주는 의도도 존재한다. 남아 있는 비너스 로마 신전 천정을 살펴보면, 그리고 그 아래에 안치되었을 비너스 신상을 상상해보면, 경건함이 절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궁륭 표면이 마름모꼴 형태로 조작되어 있어 (판테온과 유사하게), 정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외부 빛으로 인한 밝음과 어두움 현상이 연출될 수 밖에 없다. 맥주 깡통을 눕혀 횡으로 절단하였을 때 남겨지는, 절반으로 잘려진 맥주 캔이 천정에 올려져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내부가 마름모꼴 혹은 직사각형 형태로 나뉘어져 있고 움푹 패여져 있다고 상상해보면 이 거대한 신전이 기원후 4세기의 미적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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