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R%C3%B6mische_Tetrarchie#/media/File:Venice_%E2%80%93_The_Tetrarchs_03.jpg
테트라키 시스템을 통해 로마의 안정, 지중해의 통합을 이루려했던 디오클레치안의 바램은 충족되지 못했다. 앞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누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물리치고, 기원후 324년 리키니우스를 제압함으로써 지중해 지배의 온전한 권력을 확립할 때까지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계속되었다. 어찌보면 디오클레치안-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갈망했던, 기원후 1-2세기 경험했던 사회 통합,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을 기대했던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기원전 3세기의 혼돈을 거치면서 하나의 로마, 하나의 지중해라는 관념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디오클레치안-콘스탄티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중해는 더이상 통합될 수 없는, 원래 그대로의 다양한 모습으로 되돌가가기 시작했다.
도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의 지중해는 콘스탄티노플 건설로 마침표가 찍혀졌다.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신의 이름으로 완공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이라 불리웠던 한적한 어촌 도시를 선택하였을까? 지도를 펼쳐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 바다야말로 해상 침략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으며, 도나우 강과 발칸 반도는 북쪽의 게르만족 침입을 방어하는 데 다소나마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알프스 산맥 너머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했던 이민족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로마 사람들에게는 엄청났다). 같은 맥락에서 동쪽에 위치한 사사니안 왕국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이민족 국가)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접수하려면 오늘날의 터키를 가로질러야 하는 강행군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로마 제정 후기의 도시 개념이 그대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디오클레치안 퇴임궁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철저한 외부 방어 성벽 안에 넓다란 도로들이 일목요연하게 뻗어가고 있었고, 각 구역마다 임페리얼 포룸, 황제의 집무실과 거주지, 일반 행정 건물들, 대규모 신전 건물, 그리고 위락 시설 (경마 시설과 원형 경기장 등이 그것이다.
후기 비잔틴 시대, 즉 기원후 8-9세기 콘스탄티노플 상상 복원도. 기원전 6세기 조그만 어촌도시로 건설된 이 곳이 천년 뒤 제국의 수도로 탈바꿈하였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 비잔티움이라 불리웠던 어촌 마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자리잡았고 비잔틴 시대와 오스만 투르크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도시이자 수도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Konstantinopel#/media/File:Bizansist_touchup.jpg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노플 완공은 수도 로마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일단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수도 로마가 급전직하 망가지는 것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수도 로마는 로마 제국의 정신적 "배꼽"과도 같은 곳이었고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후에도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았다. 기원후 4세기와 5세기 지식인들이 수도 로마를 찾아와 - 17세기 내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을 찾아 지중해 동쪽으로 향한 것처럼 - 포룸 로마눔이나 임페리얼 포룸과 같은 옛 유적에 대한 경이를 표출했었다. 수도 로마가 가졌던, 기원후 4-5세기의 정신적 문화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 로마가 예전의 수도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테트라키 시대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군사 행정 도시들이 새로운 도시 개념 속에서 지어지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경제적 중심지 - 시리아의 안티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에서는 변함 없는 번영이 계속되었던 반면, 수도 로마에는 인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공 시설물들이 들어서지 않았으며 기존 건물들의 유지 보수하는 데 있어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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