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룸 로마눔은 수도 로마의 위상 저하를 어떻게 경험하였을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으로부터 선물 받은 개선문은 사실 공화정 시대때부터 기념물과 개선문들이 지어졌던 포룸 로마눔 너머, 다시 말해 포룸 로마눔 바깥에 세워졌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 세대인 디오클레치안 황제는 5개의 기둥을 포룸 로마눔 안쪽 로스트라 (연단) 뒤쪽에 줄지워 세웠다. 디오클레치안이 본인 자신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의해 포룸 로마눔을 활용한 경우라면, 콘스탄티누스는 본인의 의지가 그다지 반영되지 않은, 신민의 뜻에 의해 포룸 로마눔이 활용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디오클레치안과 콘스탄티누스 사이에 막센티우스라는 이가 존재하며, 그야말로 포룸 로마눔 -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의 포룸 로마눔, 다시 말해 공화정 시대 포룸 로마눔 경계를 훨씬 넘어선 공간을 말한다 - 을 마지막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막센티우스가 죽은 후 포룸 로마눔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제외하고) 변변한 기념물이나 대형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서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더 이상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을 만한 땅이 포룸 로마눔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귀족, 황제들이 굳이 기존의 건물을 허물어서 그 위에 새 건물을 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포룸 로마눔 이외의 공공 장소가 많았기에 굳이 포룸 로마눔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로마 이외의 도시들이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비좁은 포룸 로마눔에 기념물이나 대형 건물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기원후 7세기 초반에 세워진 포카스 기둥이다. 비잔틴 제국 황제가 포룸 로마눔에 기념 조형물을 세웠던 배경에는 기원후 6세기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안이 벌였던 서로마 제국 영역 탈환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이후, 기독교 중심지로서의 로마, 로마에 상주하는 교황에 대한 경건함을 표현하려는 의도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수도 로마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만천하에 알리려는 의도가 존재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막센티우스는 수도 로마에 근거한 이탈리아 마지막 권력자였다. 여기에서 그를 권력자라고 한정짓는 이유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단 한번도 황제라는 칭호를 공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치안과 함께 대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렸던 막시미니안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군사적 정치적 능력을 전혀 검증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둔 귀족들과 로마 방위군단병의 후원을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렇지만 테트라키 시대 이후 대소황제로 활약하고 있던 이들에게 수차례 무시당했고 - 왜냐하면 그에게 황제 칭호가 내려질 경우 디오클레치안이 만들었던 대소 황제 체제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일종의 반란 수괴 정도로 치부되었다.두 차례에 걸친 막센티우스 진압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마자 기원후 312년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권력을 확립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예 라인 주둔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다. 막센티우스와의 일전은 로마 북부 밀비안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투 중 막센티우스는 전사하고 만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Maxentius#/media/File:129_Maxentius.jpg (
막센티우스가 주조했던 동전)
10년도 안 되는 집권 기간 동안, 이탈리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했던 그가 남긴 족적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로마 외곽에 디오클레치안의 퇴임 궁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주지를 지었는데, 경마장과 자신과 자신 가족이 묻힐 가족 묘지, 그리고 궁전으로 이루어진 막센티우스 빌라는 기원후 3-4세기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공간 속에서 생활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물들이 바로 비너스 - 로마 신전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이다.
막센티우스 빌라에 속한 경마장 일부분. 영어판 위키피티아를 보면 카라칼라 황제의 경마장을 막센티우스 빌라 내 경마장으로 소개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직까지 막센티우스 빌라 부근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Maxentiusvilla#/media/File:Rome-CircusofMaxentius.JPG
혹자는 기원후 309년에 사망한 막센티우스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만을 위한 무덤이라고 보지만, 아마도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포함한 막센티우스 가족 묘지로 사용되기 위해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443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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