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화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4.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1901128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방치된 일명 데세날리안 decennalia 부조. 뒤에 보이는 개선문이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현존하고 있는 셉시무스 세베루스 Septimus Severus 개선문이다






기둥의 밑받침을 구성하는 정사각형을 상상해볼 수 있는데, 각 면에는 4가지 주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가지 주제의 4가지 양상이 표현되어 있다. 첫째 면에는 1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인 행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토가(로마 귀족들의 공식 의상)을 입은 원로원 회원과 황제가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둘째 면에는 정중앙의 제단을 두고 황제가 원로원 회원를 배석한 채 향불을 피우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향불을 피우는 황제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 있고, 황제 정면에는 뽀족한 투구를 쓴 국가 제사장, 그 옆으로 벗거벗은 채 투구를 쓰고 서 있는 전쟁의 신, 그리고 황제 뒤편에는 원로원을 상징하는 토가를 입은 귀족, 끝으로 맨 오늘쪽에는 기원후 3세기 이후 로마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태양의 신 - 태양 빗살이 퍼지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 이 배치되어 있다.  셋째 면에는 오랜 정치적 혼란을 신에게 속죄하려는 의미에서 쓰일 제물들 (소, 양, 돼지)이 화려하게 장식된 채 제단으로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중요한 면은 바로 네번째 부조이다. 네번째 면에는 두 명의 빅토리아가 방패를 들고 있고, 그 방패 아래에는 두려움 가득한 얼굴과 몸짓의 피정복민이 무릎 꿇은 채 방패 쪽으로 자비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 기단의 연대 측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방패에 쓰여진 글귀이다.

casearum decennalia feliciter (카이사르 즉위 10주년을 축하합니다)




둘째면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10770




셋째면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111




첫째면과 넷째 면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1460018 (16세기 중반의 스케치)





넷째면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115


디오클레치안은 포룸 로마눔과 로마 주요 지점의 수많은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었다.예를 들어 원로원의 회의 장소인,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위치한 큐리아를 대대적으로 개보수했고 엄청난 규모의 공공 목욕탕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건설 작업은 어떤 실용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반면 선임 황제 트라얀이 세웠던 기둥과 비슷한 기둥들을 포룸 로마눔에 5개 이상 설치했다던지, 기둥들 꼭대기에 대소황제와 수호신 쥬피터를 세웠다던지, 각 기단 외벽에 자신의 의도 - 평등(에이꾸알리테스aegualitas),형제애(프라터니타스fraternitas),그리고 단결 (콘코르디아concordia) - 를 보여주는 부조로 설치했다는 사실은, 디오클레치안 자신의 목적과 분리해서 생각해볼 수 없다. 기원후 1-2세기 황제 포룸(일명 임페리얼 포룸)이 만들어진 이후 공식적인 정치적 종교적 장소로 활용되었지만, 디오클레치안이 포룸 로마눔에 정치적 기념물을 세웠다는 것은 포룸 로마눔이 기원후 4세기 초반에도 중요 정치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었음을 말해준다 (큐리아와 임페리얼 포룸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겠다)

우리는 포룸 로마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왜 로물루스 레무스 시대의 포룸 로마눔부터 시작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디오클레치안의 행적을 통해 대답해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디오클레치안은 포룸 로마눔이라는 공간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디오클레치안 이후 몇몇 황제들이 포룸 로마눔에 정치적 기념물을 세웠지만 그것은 기존 기념물을 새롭게 단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 이외의 군사 행정 도시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도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 오늘날의 이스탄불 - 이다. 디오클레치안 이후 정치적 선전 선동 프로그램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도시들에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에 비례하여 수도 로마 그리고 포룸 로마눔이 갖는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수도 로마가 갖는, 그리고 포룸 로마눔이 갖는 공간적 의미의 변곡점에 놓였던 인물이 바로 디오클레치안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스팔라토의 퇴임궁전
크로아티아 해변 스팔라토 (오늘날 이름 스필리트)에는 디오클레치안이 퇴임 후 거처했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기원후 295년부터 305년까지 건설되어졌던 이 궁전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스팔라토 궁전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로 160 세로 190 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형태의 이 궁전에는 황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무덤들, 회랑으로 만들어진 산책로, 쥬피터 신전, 주요 군사 행정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스팔라토 궁전에는 외부의 적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방어 시스템, 예를 들어 감시대, 성문, 근위대들의 숙소, 식량 창고 등이 구축되었다. 군사 진지를 방불케하는 퇴임 궁전은, 중세 시대 산꼭대기에 위치한 영주의 성을 연상케한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이한 권력자들은 기원후 1-2세기 황금시대와는 달리, 자신의 거주지를 폐쇄적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디오클레치안의 스팔라토 궁전은 외적 방어와 내부의 치안 부재 대비가 결합된, 어찌보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최고 권력자 주거 형태라 할 수 있다. 군사, 행정 도시들인 마일란드, 트리어, 테살로니키(그리스) 같은 곳에서도 스팔라토 퇴임 궁전과 비슷한 컨셉의 대소황제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신전, 극장, 원형 경기장, 공중 목욕탕, 황제 가문을 위한 무덤 등이 견고한 성곽 안에 통합되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들 거주지들이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발굴되지 않았음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디오클레치안의 스팔라토 궁전을 통해 테트라키 시대 황제들의 도시가 어떤 개념 속에서 설계되었는지를, 후기 고대와 중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거주지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여 변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팔라토 궁전 내 앞마당의 모습. 건축용어로 페리스틸 peristyle 로 불린다. 페리peri는 둘러싼, 스틸style 은 기둥을 뜻하는데, 함께 살펴보면 기둥으로 둘러싸여진 장소를 의미한다. 아쉽게도 로마 시대 이후 중세 시대 여러 장소에서 개보수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디오클레치안 시대 원형 자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3198


위키피디아 항목 diocletian's palace https://en.wikipedia.org/wiki/Diocletian's_Palace

2015년 6월 29일 월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3.

사실 디오클레티안이 세웠던 5개의 기둥 - 일부 학자들은 포룸 로마눔 전체를 빙 둘러싼 형태의 기둥들로 보고, 일부 학자들은 로스트라 반대편에 5개의 기둥을 상상한다 - 어떤 일부분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는 포룸 로마눔에 5개 혹은 그 이상의 기둥들이 세워졌었는지, 기둥 상단부에 진짜 황제들과 쥬피터 전신상이 올려졌었는지 확인해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디오클레티안의 기둥들이 디오클레티안 이전과 이후 기둥들과 건축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첫번째는 트라얀이 세웠던 트라얀 기둥이고, 두번째는 포카스가 세웠던 포카스 기둥이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675245 (왼쪽)
http://www.google.de/imgres?imgurl=http://www.antikefan.de/staetten/italien/rom/tempel_foren/bilder/F19B19_800.jpg&imgrefurl=http://www.antikefan.de/staetten/italien/rom/tempel_foren/trajansforum_04.html&h=800&w=530&tbnid=5DETsy9oezii0M:&zoom=1&tbnh=92&tbnw=61&usg=__QIwTh68jpwcApa4Zk-h274E2nSg=&docid=zJkX9nA-b67F_M (오른쪽 - 기원후 2세기 다키아 전쟁 발발에서부터 승전까지의 스토리를 부조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트라얀 기둥의 부조는 로마 서사 예술의 걸작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기원후 2세기 초반 황제 트라얀은 스스로의 주도 하에 포룸을 만들었는데, 학자들은 그 포룸을 트라얀 포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트라얀 포룸 서쪽 끝, 다시 말해 트라얀 포룸 정문과 마주보는 곳에 그 유명한 트라얀 기둥이 세워졌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트라얀 기둥은 (맨 꼭대기 황제 트랴안 전신상을 제외하고), 기원후 2세기 초반  정확히 말해 기원후 113년의 것이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높이 38미터의 트라얀 기둥을 통해 우리는 디오클레치안 기둥들이 맥락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트랴안 기둥을 둘둘 말면서 올라가는 면에는 트라얀의 다키아 -오늘날의 루마니아 부근 - 전쟁의 내러티브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한편 디오클레치안 사후 세대 세워졌던 포카스 기둥은 포룸 로마눔 안에 세워져 있어 우리는 포룸 로마눔 안에 디오클레치안 기둥들이 세워졌던 당시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포카스는 기원후 609년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은 기원후 476년 멸망했다) 황제였는데, 옛 제국의 수도와 이탈리아를 종교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교황 보니파체 4세에게 판테온을 헌정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옛 제국의 수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그는 또한 포룸 로마눔 서쪽에 기둥을 세웠고, 포카스에게 신세를 진 사마르가드라는 이가 번쩍이는 포카스 전신상을 기둥 꼭대기에 세웠다고 한다. 콘스탄틴 개선물과 비슷하게, 포카스 기둥 역시 기원후 7세기 당대 예술 사조에 걸맞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기원후 2세기 출처 미상의 건물 기둥을 옮겨놓은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로마에는 더 이상 숙련된 조각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옛 건축물 일부의 재활용을 경제적인 이유나 옛 전통에 대한 자부심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포카스 기둥의 현존 모습. 맨 꼭대기에 세워졌던 황금 전신상은사라졌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3781



콘스탄틴 개선문에 묘사된 기둥들은 트라얀 기둥과 포카스 기둥 사이에 존재하는 기념물이다. 그 기둥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것들이 어떤 이유에서 세워졌는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결정적인 유물을 가지고 있다: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서 발굴된 기둥 받침대는 겉면에 새겨진 부조의 예술 양식상 기원후 3세기 초반으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크기로 보아 트라얀 기둥이나 포카스 기둥과 같은 기둥 형태의 밑받침으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겉면에 새겨진 부조들의 내용으로 보아 그리고 발굴 장소를 참조해 볼 때 로마 황제가 자신의 치적을 만천하에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15년 6월 22일 월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2.

디오클레치안이 살았던 시기 역시 험난한 때였다. 그 역시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황제 참칭자들 중 하나였다. 황실 친위대 대대장에 불과했던 그가 막강한 정적들을 물리쳤던 원동력은, 어쩌면, 그의 탁월한 군사적 지휘 능력이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와 맞섰던 정적들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군사적 무능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원후 285년 군단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지 불과 1년만에 온전한 권력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상처 뿐인 영광. 왜냐하면 그의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제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타 황제들 혹은 황제 참칭자들과 다른 점은, 제국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만한 비젼과 추진력이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인 스스로의 정치 철학에 의해서이든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그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휘하 부하들이나 자문역을 하던 귀족들의 의견을 따른 것이든 그는 제국의 형태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행했던 정치, 경제, 군사, 행정적인 개혁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다. 다만 포룸 로마눔과 관련지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시도했던 권력 분할 정책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제국이 황제 한사람으로 다스려지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 그리고 계속되는 이민족 침입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 시스템을 두 명의 황제 체제로 바꾸었다. 자신을 포함하여 두 명의 황제 (이름하여 아우구스투스)를 권력 구조의 최상단에 두었고, 각각의 아우구스투스마다 소황제 한명씩을 (이름하여 카이사르)를 배치한 권력 형태를 도입했다. 이러한 권력 분점 형태를 우리는 테트라키 (테트라는 라틴어로 4, 아키는 지배를 의미한다)라 부른다. 대-소황제가 짝을 이루어 제국의 동쪽과 서쪽을 맡았고, 행정 조직 관리와 이민족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다. 어찌보면 대-소황제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만한 공간적 거점이 탄생되는 것은 당연할 일이리라. 로마를 제외한 속주 대도시가 군사적, 행정적 중심으로 탈바꿈하였는데, 예를 들어 독일의 트리어, 이탈리아 북부 마일란드, 터키 북서쪽의 니코메데이아, 시리아의 안티옥 등이 그것들이다. 디오클레치안의 테트라키는 지중해 도시 역사상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왜냐하면 인구 백만의 도시 로마가 제정 성립 이후 지중해 내 도시들 중 유일무이한 대도시였던 반면, 테트라키의 성립 그리고 그에 따른 군사적, 행정적 거점 도시의 융성은 수도 로마가 갖는 도시적 의미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후기 제정 이후 중세 시대를 넘어오면서 트리어, 마일란드, 니코메데이아, 안티옥 같은 도시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았던 점을 상기해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개선문. 

포룸 로마눔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한 개선문. 자세히 살펴보면 콘스탄틴 개선문은 기원후 4세기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원후 2세기 시절 건축물의 일부를 재활용하여 만들어진 짜집기의 것이다. 기원후 4세기 초반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건설업 자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기원후 2세기 "훌륭한" 황제들의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 콘스탄틴 개선문은 로마에 세워진 마지막 개선물이며, 기원전 2세기 예술 양식과 기원후 4세기 예술 양식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035972 (독일 고고학 협회와 쾰른 대학에서 공동으로 만든 사진 데이터 베이스에서 따 옴 www.arachne.uni-koeln.de)



다시 디오클레치안과 포룸 로마눔을 살펴보자. 기원후 303년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경 방어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테트라키 시스템이 도입되어 고착화된 지 10년이 되자 디오클레치안은 자신이 지명한 1명의 대황제, 그리고 2명의 소황제를 로마로 불러들여 권력 장악 20주년, 테트라키 성립 1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었다. 어떤 순서로 어떤 내용의 행사가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 로마 시민들에게 현금을 뿌린다던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경기가 열리거나 개선 행렬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공화정 시대 이래 정치적 선전 선동이 이루어졌던 유일한 공간, 포룸 로마눔이 10주년 기념 행사의 중심축임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루어진 포룸 로마눔에 어떤 종류의 기념물이 세워졌을 것임은 상상해볼 수 있다. 어떤 기념물가 세워졌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기원후 312년 당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지배하였던 이는 막센티누스였다(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 그는 이탈리아 바깥의 황제 참침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원로원과 여타 황제들의 중재 노력을 거부한 그를 정복하기 위해 콘스탄틴, 그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선 해가 기원후 312년이었다. 수도 로마 북부에서 벌어졌던 단 한번의 전투, 밀비안 전투 - 콘스탄틴이 이 전투 직전 꿈에서 십자가와 승리의 확신을 계시받았고,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콘스탄틴의 기독교 포용 정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계시 자체의 신빙성도 없을 뿐더러 문헌 자료들은 상반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많다) - 에서 막센티누스를 물리친 콘스탄틴은 로마 입성 후 원로원으로부터 콘스탄틴 개선문을 선물받았다

위키피디아 기사 (콘스탄틴 개선문) https://en.wikipedia.org/wiki/Arch_of_Constantine


개선문 외부 벽면에는, 여느 개선물과 다름없이, 화려한 문양과 황제의 치적을 묘사하는 부조들이 장엄하게 가득차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콘스탄틴이 로마 입성 후 원로원 및 시민들에게 환영받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장소가 포룸 로마눔임을 알 수 있는데, 그 근거는 격자 형태의 구조물, 즉 로스트라이다. 포룸 로마눔 서쪽에 위치한 로스트라는 공화정 때부터 정치인이나 황제들의 중요 연설 장소로 사용되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로스트라와 그 위 인물들 너머 뒷배경이다. 배경으로 묘사된 양쪽 가장자리 건물들 사이로 기둥들이 나열되어 있고 각 기둥들마다 인물이 세워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기둥들이 디오클레치안이 세운, 권력 확립 20주년이나 테트라키 확립 10주년 기념 기둥들이며, 수호신 쥬피터 상을 중심으로 2명의 대-소황제가 오른쪽, 나머지 2명의 대-소황제가 왼쪽에 배치된 형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콘스탄틴 개선문 북쪽 부조 중 하나. 소위 아들로쿠치오(adlocutio) 부조 . 아들로쿠치오라는 말은 황제나 중요 정치인의 대중 앞 연설을 의미한다. 황제를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배치된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정중앙에 위치한 황제에 집중되어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rch_of_Constantine#/media/File:Arch_of_Constantine_forum_frieze.jpg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Baudelaire

L'invitation au voyage

   Mon enfant, ma soeur,
   Songe à la douceur
D'aller là-bas vivre emsemble!
   Aimer à loisir
   Aimer et mourir
Au pays qui te ressemble!
   Les soleils mouillés
   De ces ciels brouillés
Pour mon esprit ont les charmes
   Si mystérieux
   De tes traîtres yeux,
Brillant à travers leurs larmes.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Des meubles luisants,
   Polis par les ans,
Décoreraient notre chambre;
   Les plus rares fleurs
   Mêlant leurs odeurs
Aux vagues senteurs de l'ambre,
   Les riches plafonds,
   Les miroirs profonds,
La splendeur orientale,
   Tout y parlerait
   À l'âme en secret
Sa douce langue natale.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Vois sur ces canaux
   Dormir ces vaisseaux
Dont l'humeur est vagabonde;
   C'est pour assouvir
   Ton moindre désir
Qu'ils viennent du bout du monde.
   - Les soleils couchants
   Revêtent les champs,
Les canaux, la ville entière,
   D'hyacinthe et d'or;
   Le monde s'endort
Dans und chaude lumière.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Charles Baudelaire L'invitation au voyage (1855 veröffentlicht)

Quelle: Charles Baudelaire, Les Fleurs du Mal. Die Blumen des Bösen. Übers. v. M. Fahrenbach- Wachendorff (Anm. v. H. Hina. Nachwort und Zeittafel v. K. Kloocke). Stuttgart 1993. 106-110


It was feburary 2002. I arrived munich in Germany alone and I had nothing to do during the day. I had no friends and no family. It was very cold. The wind was so severe because it came from south over the Alpen. I stayed at hotel all day long, sat and changed the tv channels often. I slept 12 hours at that time. Ond day late in the evening I wanted to go outside and to breathe in fresh air. I just took my old jacket and my purse. I took a walk several hours, after that I had to realize I was in the second hand book shop. I dont know yet why I bought this french-germay anthology of Charles Baudelaire. I had been not so facinated by his poetry (his works was so complicated to understand), even though I had heard his masterpieces and his life. His life was so dramatical and so uncontrolled. His life was so short like Jim Morrison. Since then I read, read and read this book. I read his essays. I had to learn french langauge just in order to understand his poetry. So whenever I read his poetry now, I feel I am corresponding with him, who is staying now in the middle of the Limbo (!).

2015년 6월 14일 일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1.

로마 말기 - 더 정확히 말해 로마가 제국이 된지 200여년이 지난 - 기원후 3세기 동안 로마 제국은 안과 밖에서 엄청난 위기를 경험했다. 로마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놓고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지금도 논의하고 있다. 19세기 계몽주의 시대 로마를 연구했던 이들은 지배 계층의 도덕적 해이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에드워드 깁번의 의견). 하지만 19세기를 거쳐 20세기로 넘어서는 동안 로마 제국 권력 구조의 내재적 취약성에 그 원인을 찾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쉽게 말해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혈연으로 승계되지 않고 로마 원로원 내에서 적절한 귀족을 선택, 추대되는 과정이었는데, 선출된 황제의 권력 정당성은 황제로서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확립되었을 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해 군사적 업적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그리고 로마 제국 내 사람들 (시민과 비시민을 포함한)의 먹고 자고 입는, 일상 생활을 잘 관리하여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능력 있는 그리고 존경 받는 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권력 중심이 확고해지는 과정이 원할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로마 지배층은 균열될 수 밖에 없었고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양상을 맞이하였다. 도덕적 해이, 권력 구조의 취약성과는 별도로 일부 학자들은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경제 정책의 실패, 이민족 침입이라는 요소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민족 침입은 로마 공화정 성립 이래 크기를 달리하고 끊임없이 발생했었고, 필자의 견해로는 적어도 기원후 3세기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만한 큰 패전을 로마는 겪지 않았다). 극히 일부분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위기 원인을 한 두개의 요소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 없다면서 앞서 말한 사항들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혼돈의 시대였던 기원후 3세기, 제국의 곳곳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정확히 말해 변방에서 혹은 수도 로마에서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은 대대장, 군 사령관 혹은 친위대장들이 스스로 황제라 부르면서 권력 기반을 군사적으로 뿌리내리려 했다. 세베루스 알렉산더 (기원후 235) 사후 근 70년 내지 80년 사이 40여명의 황제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휘하 군단병, 용병들 그리고 민병대들을 이끌고 제국 곳곳에서 서로 충돌했다. 로마 내 지배 계층들도 (공화정 시기부터 자리잡았던 명망가 귀족들, 제국 성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귀족, 돈 많은 상인들, 고위급 관리 등) 권력 구도가 수시로 변함에 따라 사분오열되었다. 정치적 상황이 이리 불안정하니 경제라고 잘 될리 없었다. 제국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 구조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징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전비 확충과 군단 유지를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주조하였고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로마 제국 내 일부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 자체를 포기하고 물물교환 시스템으로 회귀하였다고 몇몇 학자들은 보고 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고 세금 징수가 가혹해지자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는 곧바로 세수 결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로마 제국 내 사회 시스템이 취약해지자 기원후 2세기까지 비교적 잘 방어해왔던 이민족들이 국경선을 넘어서는 일이 잦아졌다. 라인강-도나우강 방어선을 넘보았던 게르만족들과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언저리(이곳은 강이 아니라 사막이 국경선 역할을 했다) 사사니안 왕국이 그들이었다.

2015년 6월 8일 월요일

A short introduction to Vitruvius (비투르비우스 소개)

번역 작업의 첫번째 대상으로 비투르비우스를 선택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짧게나마 비투르비우스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다. 기원전 80년과 70년 사이 중부 이탈리아에서 자유민 신분으로 태어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년 사망했던 것 같다. 70년 내지 60여년의 생애 중 그가 남긴 업적은 건축에 관한 10개의 책 de architectura libri decem 이다. 이 책은 현재 남아 있는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서양 건축사와 관련된 책이다. 그런데 비투르비우스의 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의 책이 지닌 가치를 짐작하게 된다. 문헌상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공화정 후기 이탈리아 내전 당시 카이사르 휘하 공병 부대에서 포병 및 공성 장비 운용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로마나 기타 이탈리아 도시에서 각종 건축물을 설계하고 시공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투르비우스 자신이 직접 언급했듯, 파눔 포투나이 Fanum Fortunae - 오늘날 파노, 아드리아 해 연안 도시 - 의 바실리카였다. 더 이상 비투르비우스의 손을 거쳐간 건축 작품은 문헌상 증명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민간과 군생활의 현장 경험이 비투르비우스의 서적을 공허한 사상누각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그 이전 세대 건축가들이 남겼던 건축 설계 자료를 나름대로 연구하였고,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그 당시 유명한 건물들을 직접 방문하여 실제적인 감각으로 체화하였다. 현장 경험과 이론적 분석, 그리고 현장 방문 이 세 박자가 어우러져 비투르비우스의 논리가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비투르비우스의 책은 총 10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건축가 교육, 건축 개념, 공공 건물과 민간 건물, 색채론, 건설장비와 시계 제작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보였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공공 건물과 민간 건물을 다루는 장들이다 (3장부터 7장까지). 이 장에서 그는 그리스 로마 시대 공공 건축물 (신전, 극장, 포룸, 개선문 등)과 민간 건축물 (귀족 및 평민들의 주거지)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은 사라져 알 수 없는 수많은 건축물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투르비우스의 책은 비투르비우스 사후 아주 간간히 언급될 정도로 잊혀졌다. 중세 시대 대략 80여개의 필사본이 유럽 각국의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고 하는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비교해보면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 남겨진 건축적 유물, 예를 들어 로마의 판테온, 에 대한 지적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1414년 또는 1416년 비투르비우스의 필사본이 최초 발견된 이후 15세기에 활동했던 르네상스 예술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들은 비투르비우스의 미출간 책을 참조삼아 자신의 독창적 업적을 이루었다. 1486년 비투르비우스 책이 라틴어로 출간되고 1521년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이후 16-18세기 동안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비투르비우스의 책은, 비록 건축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건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였을지언정, 유럽의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이 탄생하고 유지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비투르비우스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케치 1485 또는 1490년 정도로 추정) 

오늘날 비투르비우스의 책이 지닌 가치는 무엇일까? 건축에 대한 새로운 이념이나 사상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중언부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건축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리스 로마 건축이 어떻게 유럽에서 르네상스 시대 받아들여졌는지를 비교 분석하는 데 비투르비우스의 책이 필수적이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필자처럼, 비투르비우스에 나타난 건축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 남아 있는, 혹은 남아 있지 않는 유적을 보다 심도있게 이애할 수 있다. 


라틴어 원본은 1912F. Krohn에 의해 발행된 ,건축에 대하여'를 참조하였다. 인터넷 상으로 아래 주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072%3Abook%3D1%3Achapter%3Dpreface%3Asection%3D1)

한국어 번역은 1914Morris Hicky Morgan의 책 , Viturvius. The Ten Books on Architecture'을 참조하였다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073%3Abook%3D1%3Achapter%3Dpreface%3Asection%3D1)


비투르비우스에 대한 연구서 중에서 참고할 만한 것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1. Curt Fensterbusch,Vitruvii De architectura libri decem (62008, 독일어), 2. Heiner Knell, Viturvs Architekturtheorie, Eine Einführung (32008, 독일어), 3. Antonio Corso, Elisa Romano, Pierre Gros, Viturvio, de architectura (1998, 프랑스어)를 들 수 있다

2015년 6월 6일 토요일

exposé for phd study


This is my research project for which I have prepared last three years long. I could not find one or two supervisor(s) with whom I will collaborate for this Phd thesis. I beg you any advices and comment whatever you want to tell. 

Handwerk im westlichen und südlichen Kleinasien von archaischer Zeit bis zur römischen Kaiserzeit

  1. Einleitung

  1. 1. Thema

Im Grunde genommen braucht der Mensch die Nahrung, die Kleidung und die Wohnung für das Leben. Der Mensch braucht auch die Waren, die nicht direkt mit dem Lebensnotwendigen zu tun haben, wie Luxusgüter, und die Dienstleistungen, wie Gesundheitsversorgung oder Bildungsbedarf. Alle Produkte und Dienstleistungen, die für das menschliche Leben erforderlich sind, wurde durch menschliche Arbeit hergestellt, verteilt und konsumiert, und man kann diesen Prozess - Produktion, Werbung, Distribution und Konsumption sowie Entsorgung der Güter und Dienstleistungen – als wirtschaftliche Handlung1 definieren.

Wirtschaftliche Handlungen ereigneten sich sowohl in prähistorischer Zeit als auch in historischer Zeit. Dementsprechend gab es schon die Überlegungen zu deren Ursache z. B. (am einfachsten) die Deckung der Nachfrage und individuelle bzw. kollektive Interessen für die Profitmaximierung u.s.w. Es ist klar, dass wirtschaftliche Handlungen - Produktion, Distribution und Konsumption der Waren und Dienstleistungen - in verschiedenen Gesellschaften auf verschiedene Art und Weise verwirklicht wurden. Es ist ebenso klar, dass wirtschaftliche Handlungen seit langem wissenschaftlich erforscht wurden und noch werden z. B. griechische Schriftsteller wie Ps.-Aristoteles und Xenophon haben schon mit der Hauswirtschaft auseinandergesetzt, und heutzutage gilt die Wirtschaftswissenschaft als ein großer Studienbereich, der verschiedene Teildisziplinen an sich hat.
Bei dieser Dissertation geht es um die Untersuchung über wirtschaftliche Handlungen vormoderner Gesellschaft. Hier wird ein Versuch unternommen, wirtschaftliche Handlungen griechisch-römischer Zeit im Mittelmeerraum zu recherchieren. Wirtschaftliche Handlungen der Antike und deren Charakteristika wurden, wie bekannt, seit dem Ende des 19. Jahrhunderten – entsprechend der Herausbildung moderner Wirtschaftswissenschaft - konsequent in der Geschichtswissenschaft diskutiert2. Diese Studie beschäftigt sich demgegenüber mit wirtschaftlichen Handlungen griechisch-römischer Zeit im Perspektive der Archäologie. Die Betonung im Perspektive der Archäologie bedeutet, dass diese Studie grundsätzlich auf die Analyse und (Neu)interpretation von Funden und Befunden stützt. Das methodische Konzept, Analyse und (neu)interpretation von Funden und Befunden deutet wiederum darauf hin, dass die Dienstleistungen, wie Bildung oder Gesundheitsversorgung, und die Konsumption der Güter als Thema ausgeschlossen sind, da sie archäologisch schwierig nachzuweisen sind. Beide verbleibende Bereiche - Produktion und Distribution der Gütern – stehen darüber hinaus bei dieser Untersuchung im Vordergrund.

Dass die Produktion der Gütern sowohl mit handwerklicher Produktion als auch mit der Landwirtschaft, Fischerei, Forstwirtschaft u. a. verbunden ist, ist offensichtlich. Aber die letzten genannten sind viel mehr historisch erfassbar, so dass sie thematisch bei dieser Untersuchung nicht berücksichtigt werden müssen3. Andererseits wurde die Distribution der Gütern, unabhängig von Zeit und Ort, überall realisiert, aber die Distribution der Güter archäologisch ist, wie im 3. Kapitel zu behandeln ist, m. E. nicht eindeutig nachzuweisen. Aus diesen Gründen fokussiert sich diese Studie auf das Handwerk, das durch die Funde/Befunde und archäologische Materialien nachweisbar ist. Dabei sind der Bergbau, der als Gewinnung der primären Materialien für handwerkliche Produktion gilt4, und kommerzielle Aktivitäten, ausschließlich im Bezug auf der Distribution handwerklicher Erzeugnisse (siehe unten), zu berücksichtigen.

  1. 2. Forschungsstand

Die Forschung über das Handwerk wurde meistens im westlichen Mittelmeerraum aktiv durchgeführt. Eindeutig sind die Städte in Italien z. B. Pompeji5, Herculaneum6, Ostia7 und Rom8 als Beispiele zu nennen. Bei der Forschung über das Handwerk jener Städte ist es bezeichnend, dass (anstelle des Handwerks ad hoc) der Bautypus handwerklicher Produktionsstätte, nämlich taberna, die aus dem Stadtbau von der Spätrepublik bis zur Frühkaiserzeit resultierende Veränderung der tabernae-Verteilung und deren sozial-ökonomische Kontext intensiv untersucht wurden. Solche Forschungstendenz ist m. E. in der aktuellsten, alle italienische Städte der Republik und Kaiserzeit umfassenden Studie nicht geändert9.

Die Forschung über das Handwerk im östlichen Mittelmeerraum konzentrierte sich an beiden Städten, Delos und Athen, wo historische und archäologische Materialien ausreichend vorhanden sind. Das Handwerk in Delos wurde im Zusammenhang mit den Handelsräumen und Orten erforscht, aber man muss diesbezüglich davon ausgehen, dass von ca. 500 delischen Geschäftsräumen lediglich 33 Werkstätten archäologisch nachgewiesen sind10. Im Vergleich zur Forschung über das Handwerk in Delos ist die Forschung über das Handwerk in Athen etwa ausführlicher: literarische Texte z. B. Platon, Xenophon und epigraphische Materialien wurden in vieler Hinsicht analysiert, wodurch verschiedene Dimensionen bezüglich des Handwerkes - Definition des Handwerks, Nennung des Handwerkers, ambivalente Bewertung über das Handwerk bzw. Handwerker, Entwicklung handwerkliches Produktionsprozesses, Arbeitsverteilung und die daraus resultierende Spezialisierung handwerklicher Produktion - deutlich gemacht werden konnten. Archäologisch wurden die Funde/Befunde aus Athen, Attika, Poloponnes und sogar Thasos in die Forschung mit einbezogen, so dass das Handwerk im Kontext - Handwerk in Oikoi, Handwerk in ländlicher Siedlung und Handwerk in der Stadt - verdeutlicht wurden11. Anhand des Letzteren ist die Forschung von G. Sanidas insbesondere wichtig: Er ging zunächst von literarisch-epigraphische Materialien bezüglich des Handwerk, Handwerker und Werkstatt aus, und dann listete die Handwerksbranche jeweiliger Stadt bzw. Siedlung in Attika und Peloponnes, vor allem in Athen auf. Nachdem sozial-ökologische Voraussetzungen für die Etablierung eines Handwerksbereiches analysiert wurden, abschließend setzt er das Verhältnis zwischen Wohnraum und Werkstatt, topographische Konstellation verschiedener Werkstätte in einer Stadt oder in einer ländlichen Siedlung und deren sozial-ökonomische Bedingungen auseinander12.

Wirft man die Auge über Delos und Athen hinaus in den Osten, findet man, dass eine archäologische Studie über das Handwerk in Kleinasien noch aussteht. Anders gesagt, bei der Ausgrabung und Feldforschung wurden die Funde/Befunde und archäologische Materialien, die unmittelbar im Zusammenhang mit dem Handwerk standen, oft berichtet, wohingegen eine, all diese Belege zusammenfassende und miteinander vergleichende Studie noch nicht ausgeführt wurde13. Die Forschungssituation bezüglich des kleinasiatischen Handwerks ist sehr interessant, weil vor rund 60 Jahren alle literarische Quellen anhand des Handwerks und Handels in Kleinasien zusammengefasst14, und Vielzahl der historischen und archäologischen Materialien seit jeher sukzessiv hinzugefügt wurden15.

Woran liegt der Grund, dass das Handwerk in Kleinasien, anders als in Pompeji, Ostia, Athen und Delos u. a., nicht erforscht wurde? Warum wurden die Belege, die auf das Handwerk in Kleinasien hinweisen, noch nicht zusammengefasst? Es ist offensichtlich, dass in Kleinasien eine umfangreiche Ausgrabung wie in Athen und Pompeji nicht stattfand. Die Zahl solcher Belege ist im Vergleich mit denen in Athen z. B. relativ gering. Diese Tatsachen bedeuten m. E. nicht, dass das Handwerk in Kleinasien gegenüber der Landwirtschaft, Forstwirtschaft, Fischerei u. a. eine geringe Rolle bei der Wirtschaft gespielt hat (vgl. Cic. att.). Unabhängig davon, ob das Handwerk in Kleinasien als häusliche Produktion für Eigenbedarf oder als Massenproduktion für die Vermarktung oder als eine Kombination von beiden zu definieren ist (stricke Unterscheidung ist in der Tat unmöglich), scheint mir das Handwerk in Kleinasien eine nicht zu übersehenden Position in der Wirtschaftsstruktur einer Stadt bzw. einer ländlichen Siedlung besaßen zu haben. Daraus sind folgende Fragen zu stellen.

  1. 3. Fragestellung

Erstens, wer war eigentlich der Handwerker in Kleinasien? Welche soziale Position hatte einzelner Handwerker bzw. die Gruppe der Handwerker ? Wie wurde eine Werkstatt in Kleinasien genannt? Fanden in Kleinasien die Arbeitsverteilung und die Spezialisierung handwerklicher Produktion statt (vgl. Xen. Kyr. 8. 2), wie im europäischen Mittelalter zu sehen ist?

Zweitens, wo in Kleinasien und welche Produkte wurden im bestimmten Zeitraum hergestellt? Ob und inwiefern sind literarische Quellen archäologisch nachzuweisen, welche über das regional bzw. überregional bekannte, handwerkliche Produkt berichteten? Welche ökologischen und sozialen Faktoren sind für die Entstehung und Entwicklung handwerklicher Produktion festzustellen, welche je nach der Stadt und Region unterschiedlich verwirklicht wurden?

Drittens, in Kleinasien erfuhr man verschiedene politische Ereignisse seit archaischer Zeit z. B. Eindringen des Alexanders den Großen, Entstehung und Niedergang der pergamenischen Herrschaft, Etablierung des Imperium Romanum u. a16. Einen politischen Versuch gab es immer, Hegemonie nicht nur innerhalb von Kleinasien sondern auch außerhalb von Kleinasien zu etablieren und erweitern. Hingegen sieht man eine Gegenbewegung, politische, kulturelle und wirtschaftliche Autonomie der polis aufrecht zuhalten. Eine Spannung zwischen hegemoniale Machtausübung und Überlebensstrategie einzelner polis ist also seit archaischer Zeit durchaus sichtbar. In diesem Hintergrund stellen sich die Fragen, ob und wie sich das Handwerk, das in einer Stadt bzw. in einer ländlichen Siedlung als Rückgrat der Wirtschaft gelten sollte, im Lauf der Zeit änderte? Welche politische, kulturelle und ökonomische Rahmenbedingungen haben die Modalitäten handwerklicher Produktion, insbesondere in hellenistischer Zeit und in römischer Kaiserzeit, wandeln oder nicht wandeln lassen17?

  1. 4. Methode

Zur Beantwortung erster Fragegruppe ist eine literarisch-epigraphisch-ikonographische Untersuchung über das Handwerk in Kleinasien nötig, die als Vorstudie der archäologischen Untersuchung gilt. Dadurch sind die Definition des Handwerkers, dessen soziale Stellung, Nennung der handwerklichen Produktionsstätte (ergasteria, oiketeria, ergaston oiketeria u. a.)18 deutlich zu machen. Die Möglichkeit der Arbeitsverteilung und Spezialisierung bei der handwerklichen Produktion ist auch zu überlegen, wobei die Forschungsergebnisse in Attika und Peloponnes mitzudenken sind. Diese Vorstudie stützte sich selbstverständlich auf bisherige historische Forschungsergebnisse, aber auch auf die jüngst in Kleinasien gefundenen literarisch-epigraphisch-ikonographischen Materialien. Erhofft ist es, hier bestimmte Charakteristika des kleinasiatischen Handwerkes und der kleinasiatischen Handwerker mithilfe der neuen, zu analysierenden Materialien herauszufinden.

Für zweite Fragegruppe geht man von archäologischen Funden und Befunden aus. Zuvor muss man im Auge fassen, dass im römischen Kleinasien 300 bis 500, eigene Münze prägende Städte existierten19. Eine Stadt von denen wie Pergamon funktionierte seit archaischer Zeit als Stadt, während einige Städte lediglich im bestimmten Zeitraum besiedelt und danach verschwunden wurden. Andererseits ist die Forschung über kleinasiatische Städte, die an sich verschiedene Siedlungsgeschichte aufweisen, ganz unterschiedlich durchgeführt z. B. laufende und gut informierende Forschungen wie in Pergamon und Ephesos gegenüber den Forschungen wie in Side und Perge, über deren Ergebnisse keine zufriedenstellende Grabungsberichte publiziert wurden. In einigen Städten z. B. Metropolis wurde sogar sehr begrenzte Ausgrabung durchgeführt, so dass kein vollständiges Stadtbild vor Auge zu stellen ist20. Unter diesen Umständen richtete sich der Hauptteil dieser Studie an die Städte und Siedlungen im westlichen und südlichen Kleinasien (geographisch sind sie römische Provinzen Asia, Lykia et Pamphylia21, Kilikia22), wo die Stadtgrabung und Surveyarbeit relativ ausreichend vorgebracht wurden. Der Rest der Regionen – nach römischen Provinzen Bithynia et Pontus23, Galatia24 und Kappadocia – ist geographisch ausgeschlossen, wohl mangels der Stadtgrabung und Surveyarbeit. Bei der Untersuchung über die Städte und Siedlungen im westlichen und südlichen Kleinasien ist das Handwerk nicht nach der Stadt und Siedlung, sondern nach der Kategorien handwerklicher Produkte aufzulisten25, wie G. Sanidas gemacht hat. Die Kategorien handwerklicher Produkte sind nicht so kompliziert und nicht so kategorieübergreifend wie ein High-Tech Produkt z. B. Handy und Auto. Handwerkliche Produkte werden ersten nach primärem Material sortiert, z. B. Ton, Metall, Stein, naturale Ressource, Agrarprodukte. Die Endprodukte, die durch erste bzw. zweite Verarbeitung hergestellt wurden, werden nach sekundärem Material sortiert z. B. Ton (Dach, Terrakotta, Gefäß u. a.), Metall (Werkzeug, Münze, einschließlich der Metallförderung), Stein (Skulptur, Baumaterial, einschließlich der Steinförderung), Pflanzen und Tierproduktion (Holzverarbeitung, Leder- und Knochenverarbeitung, Färberei, Seilerei u. a.), Verarbeitung der Agrarprodukte (Wein, Olivenöl, Parfüm, Bäckerei, Restaurant u. a). Bei der Kategorisierung handwerklicher Produkte ist es gezwungen, das Handwerk im räumlichen Kontext (oikos, chora, Stadt) zum einen, die Entstehung, Entwicklung und Verschwinden einer bestimmten handwerklichen Produktion in ökologischen (Wasser, Feuer, Holz u. a.) und sozialen Bedingungen26 zum anderen zu interpretieren.

Bevor auf dritte Fragegruppe einzugehen, ist ein kontroverses Thema zu erforschen, nämlich Handel27. Nach literarischen Quellen ist bekannt, dass der Handel am Hafen, am Stadttor, an der Agora, im Macellum, im Heiligtum (ständig oder im bestimmten zeitlichen Abstand), und im Laden sowie an der Werkstatt stattfand28. Problem ist m. E., dass in solchen Räumen und Orten ganz selten die Belege für die Handelsaktivitäten gefunden wurden. Zu nennen sind hierfür die Messgeräte (an der Agora, im Mecellum), Verkaufstisch (an der Agora, im Macellum29, im Laden), und eine ungewöhnliche große Menge der Keramikscherbe. Umso interessanter ist, dass trotz des mangelnden archäologischen Hinweises die Stadtforscher unreflektiert den Handel im Zusammenhang mit dem Handwerk betrachtet haben z. B. Th. Wiegand interpretierte den an der Hauptstraße geöffneten Raum in Priene als Laden, und dessen Hinterzimmer als Produktionsstätte30 und P. Karvonis nannte solchen Raum in Delos uneindeutig espace polyvalance, also einen Raum, der wegen des Fehlens archäologischer Hinweise mit irgendwelchen gewerblichen Aktivitäten in Beziehung gesetzt wurde31. Aufgrund dieser Forschungsmeinung besteht die Notwendigkeit, das Verhältnis zwischen Handwerk und Handel handwerklicher Produkte – der Handel der Agrarprodukte, Forst- und Fischereiprodukte bleibt hier unbeachtet – archäologisch erneuert klarzustellen.

Die Antwort auf dritte Fragegruppe ist dadurch möglich, dass das Handwerk in Kleinasien etwa chronologisch untersucht wird. Solche methodische Herangehensweise fehlt bei der Forschung von G. Sanidas. Eine chronologische Untersuchung anhand des Handwerks im gesamten Kleinasien ist aber schwierig, weil archäologische Stadtforschung im westlichen und südlichen Kleinasien, wie gesagt, unterschiedlich ausgeführt, und vor allem die Forschung über ländliche Siedlungen eher vernachlässigt vollzogen wurde. Ein Zusammenhang zwischen politischem Wandel und handwerklicher Produktion ist daher nicht in ländlichen Siedlungen sondern in den Städten zu verdeutlichen, nämlich in den Städten, wo archäologisch und historisch aktiv erforscht wurden und werden. Ausgewählt sind aus diesem Grund die Städte - Priene, Pergamon, Ephesos, Milet, Aphorodisias, Hierapolis, Sagalassos. Diese Städte als Beispiele analysierend, werden die Räume und Orte handwerklicher Produktion von archaischer Zeit bis zur römischer Kaiserzeit festgestellt. Deren urbanistische Kontext (in der Nähe vom Heiligtum, am öffentlichen Platz, am Friedhof, in privater Wohnung u. a.) und die Möglichkeit der Konzentration bestimmter Produktionsbereiche wie Keramaikos in Athen32 sind zum einen zu überlegen. Zum anderen sind das Handwerk in der Stadt und das Handwerk in deren Chora miteinander zu vergleichen. Ferner sind die topographische Verteilung handwerklicher Produktion in jeweiliger Stadt und der Wandel bzw. die Triebkraft des Wandels handwerklicher Produktion, insbesondere von hellenistischer Zeit bis zur römischen Kaiserzeit, durch Vergleich mit dem Handwerk vorrömischer Zeit, vor Auge zu stellen. Auch wenn es nicht direkt meinem Thema entspricht, ist schließlich die Art und Weise handwerklicher Produktion seit dem 3. Jahrhunderten nach Christus kurz zu erörtern.

  1. 5. Grenze und Ziel

Das Land Kleinasien - heutige Türkei - entspricht einer 770 km² großen Landmasse (vgl. Deutschland 350 km²), und zeigte damals eine Vielfalt von Produktivität und Wirtschaftspotenzial, insbesondere in römischer Kaiserzeit33. Wie heute, war damals der Unterschied zwischen Produktivität und Wirtschaftspotenzial innerhalb einer Region ziemlich groß. Natürliche Gegebenheiten und sozial-ökonomische Bedingungen variierten sich stark je nach der Region. Darüber hinaus ist es nicht möglich, die Wirtschaft in Kleinasien als eine Reihe von städtischen und ländlichen Siedlungen archäologisch vollständig zu rekonstruieren. Bei dieser Studie wird stattdessen ein Umriss handwerklicher Produktion in der Stadt, aber auch in ländlicher Siedlung geworfen. Dadurch werden wir die Wirtschaftsstruktur einer kleinasiatischen Stadt bzw. einer kleinasiatischen Siedlung verstehen. Anders ausgedrückt, durch die Studie über das Handwerk in Kleinasien können wir also in der Lage sein, ein Wirtschaftsmodell34 in Kleinasien und zugleich ein Verständnis über gesamte antike mediterrane Wirtschaft zu gewinnen35.
1http://de.wikipedia.org/wiki/Wirtschaft
2M. I. Rostovtzeff, Th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Roman Empire (Oxford 1926); ders., Th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Hellenistic World (Oxford 1941); M. I. Finley, Die Antike Wirtschaft. Übers. von A. Wittenburg (München 1977) – Debatte zwischen Modernist und Primitivist: K. Ruffing, Wirtschaft in der griechisch-römischen Antike (Darmstadt 2012); Forschungsprojekt The Urban Economy in the Roman World. Uni. Chicago https://lucian.uchicago.edu/blogs/urbaneconomy/. – Überblick auf aktuellen Forschungsstand.
3Vgl. F. Blondé – A. Muller, Artisanat, artisans, atelier en Gréce ancienne. Définition, esquisse de bilan, Topoi 8 suppl. 2, 1998, 835 – Produkte der Landwirtschaft, Fischerei und Forstwirtschaft wurden dort ausgeschlossen, weil sie sich nicht als Endprodukte erweisen. Demgegenüber wurden sie hier wegen des Fehlens der archäologischen Nachweisbarkeit mitberücksichtigt, denn eine Unterscheidung zwischen Erst- und Endproduktion ist nicht streng zu erfolgen, vor allem in der Region, die von Landwirtschaft, Fischerei und Forstwirtschaft ausgeprägt war z. B. in Kleinasien.
4Vgl. Blondé – Muller a. O. (Anm. 3) 837 – Dort wurden die Stein- und Metallförderung ausgeschlossen, weil sie mit dem primären Material zu tun haben. In Kleinasien waren aber die Stein- und Metallförderung als wichtige Wirtschaftsbereiche von Bedeutung, so dass sie im Zusammenhang mit Handwerk betrachtet werden müssen.
5V. Gassner, Die Kaufläden von Pompeji (Wien 1986); R. Laurence, Roman Pompeji. Space and Society 2(New York 2007)
6N. Monteix, Les lieux des métier. Boutiques et ateliers dʼHerculanum (Rome 2010) – Funktionsbestimmung eines Raumes ist trotz zahlreicher Funde immer schwierig z. B. Raum Nr. 10 von Insula Or. IIa (Steinmetzwerkstatt?)
7G. Girri, La taberna nel quadro urbanistico e sociale di ostia (Roma 1946)
8J.-P. Morel, La topographie de lʼartisanat et du commerce dans la Rome antique, in: LʼUrbs. Espace urbain et histoire ler siècle av. J.-C. - IIIe siècle ap. J.-C. Actes du colloque international de Rome. 8-12 Mai 1985 Rome (Rome 1987) 127-155
9Vgl. Habilitationsprojekt von M. Flohr Building Tabernae (mikoflohr.nl)
10M. Trümper, Die ʼAgora des Italiensʻ in Delos. Baugeschichte, Architektur, Ausstattung und Funktion einer späthellenistischen Porticus-Anlagen (Rhaden 2008), 287. 290f; Ph. Bruneau – J. Ducat, Guide de Délos 4(Paris 2005)
11http://fr.wikipedia.org/wiki/Artisanat_en_Gr%C3%A8ce_antique – die Literaturen in diesem Artikel sollen bei der Dissertation stark berücksichtigt werden, vor allem beide Kolloquiumsbände: F. Blondé – A. Muller (Hrsg.), Lʼartisanat en Grèce ancienne. les artisans, les ateliers. Actes du colloque de Lille. 11-12 décembre 1997. Lyon, Topoi 8 suppl. 2, 1998, 541-845; F. Blondé – A. Muller (Hrsg.), Lʼartisanat en Grèce ancienne. Les productions, les diffusions. Actes du Colloque de Lyon. 10-11 décembre 1998 organisé par lʼÉcole françise dʼAthènes, la Masion de lʼOrient méditerranéen Jean Pouilloux et lʼUniversité Charles-de Gaulle. Lille (Lille 2000)
12G. Sanidas, La production artisanale en Grèce. Une approche spatiale et togographique à partir des exemples de lʼAttique et du Péloponnèse du VIIe au Ier siècle avant J.-C. (Paris 2013) non vidi
13Ausnahme ist die Untersuchung über die sogenannten Byzantinischen Shops in Sardis – siehe G. M. A. Hanfmann – J. C. Waldbaum. A Survey of Sardis and the Major Monuments outside the City Walls (Cambridge MA 1975); A. Harris, Shops, Retailing and local economy in the early Byzantine World. The Example of Sardis, in: K. Dark (Hrsg.), Secular Buildings and the Archaeology of Everyday life in the Byzantine Empire (Oxford 2004), 82-122
14T. R. S. Broughton, Roman Asia Minor, in: T. Frank (Hrsg.), An Economic Survey of Ancient Rome. Vol. 4 (New Jersey 1938/rep. 1959), 499 – 950
15P. Barresi, Province dellʼasia minore. Costo die mormi architettura pubblica e committiza (Roma 2003), insbes. 247-251 (magazzini, stoai con ergasteria, edifici commerciali); H.-W. Drexhage, Wirtschaftspolitik und Wirtschaft in der römischen Provinz Asia in der Zeit von Augustus bis zum Regierungsantritt Diokletians, AMS 59 (Bonn 2007) – ein Beispiel in Provinz Asia; A.-V. Pont, Orner la cité. Enjeux culturels et politiques du paysage urbain dans lʼAsie gréco-romaine (Bordeaux 2010) – auf rhetorische Texte stützend
16D. Magie, Roman Rule in Asia Minor to the End of the Third Century after Christ (New Haven 1950) – maßgebend; Chr. Marek, Geschichte Kleinasiens in der Antike. Unter Mitarbeit von Peter Frei (München 2010) – aktuelle Zusammenfassung.
17M.-Chr. Hellmann, Lʼarchitecture grecque. Bd. 3. Habitat, urbanisme et fortifications (Paris 2011) – Stadtbau in hellenistischer Zeit; P. Gros, Lʼarchitecture romaine du début du IIIe siècle av. J.-C. à la fin du Haut-Empire. Bd. I. Les monuments publics (Paris 1996); H. v. Hesberg, Römische Baukunst (München 2005); P. Gros – M. Torelli, Storia dellʼurbanistica. Il mondo romano 2(Rome 2010) – Stadtbau in römischer Kaiserzeit
18Vgl. M.-C. Hellmann, Recherches sur le vocabulaire L´architecture Grecque D´après les inscriptions de Délos (Paris 1992) s. v. Ergasterion (S. 138 – 140) und Oikema/Oikesis (S. 288 – 290)
19S. R. F. Price, Rituals and Power. The Roman Imperial Cult in Asia Minor (Oxford 1984/ND 1996); E-Schwertheim – E. Winter (Hrsg.), Stadt und Stadtentwicklung in Kleinasien. AMS 50 (Bonn 2003) 87
20D. Parrish (Hrsg.), Urbanism in Western Asia Minor. New Studies on Aphrodisias, Ephesos, Hierapolis, Pergamon, Perge and Xanthos. With Contributions von H. Abbasoğlu. JRA Suppl. 45 (Porthsmouth RI 2001); Chr. Berns – H. v. Hesberg – L. Vandeput – M. Waelkens (Hrsg.), Patris und Imperium. Kulturelle und politische Identität in den Städten der römischen Provinzen Kleinasiens in der frühen Kaiserzeit. Kolloquium Köln. November 1998. BABESCH 8 (Leuven 2002); W. Radt (Hrsg.), Stadtgrabungen und Stadtforschung im westlichen Kleinasien. Geplantes und Erreichtes. Internationales Symposion 6. - 7. August 2004 in Bergama (Türkei). BYZAS 3 (Istanbul 2006)
21C. Bayburtlouglu, Lycia. Übers. v. Yaprak Erdem Georgescu (Antalya 2004); G. Arena, Città di panfilia e pisidia sotto il domino romano 2(Catania 2005); H. Brandt – F. Kolb, Lycia et Pamphlyia. Eine römische Provinz im Südwesten Kleinasiens (Mainz am Rhein 2005); F. Kolb. Burg-Polis-Boschofssitz. Geschichte der Siedlungskammer von Kyaneai in der Südwesttürkei (Mainz am Rhein 2008); J. D. Grainger, The Cities of Pamphlyia (Oxford 2009); Th. Marksteiner, Lykien. Ein archäologischer Führer (Wien 2010)
22M. C. Hoff – R. F. Townsend (Hrsg.), Rough Cilicia. New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Approaches (Oxford 2013)
23Chr. Marek, Pontus et Bithynia. Die römischen Provinzen im Norden Kleinasiens (Mainz am Rhein 2003)
24S. Mitchell, Anatolia. Land, Men and Gods in Asia Minor. Bd. I u.II (Oxford 1993)
25B. Büchsenschütz, Die Hauptstätten des Gewerbfleisses im klassischen Alterthume (Leipzig 1869); R. Genouvès, Dictionnaire méthodique de lʼarchtecture grecque et romane. Bd. 3 (Rome 1998) 111-122; siehe auch www.instrumentum-europe.org – vollständige Kategorien des Handwerkes
26Vgl. C. Saliou, Artisanats et espace dans le monde romain. Droit et projets urbanis (Ier siècle av. J.-C. - VIe siècle ap. J.-C.), in: A. Esposito – G. M. Sanidas (Hrsg.), Quartiers artisanaux en Grèce ancienne. Une perspective méditerranéene (Septentrion 2012) 39-53
27Vgl. V. Chankowski – P. Karvonis (Hrsg.), Tout vendre, tout acheter. Structures et équipements des marchés antiques. Actes du colloque dʼAthénes. 16-19 juin 2009 (Paris 2012)
28DNP s. v. Handel (P. Schreiner)
29C. de Ruyt, Macellum. Marché alimentaire des romains (Louvain-la-neuve 1983)
30Th. Wiegand – H. Schrader, Priene. Ergebnisse der Ausgrabungen und Untersuchungen in den Jahren 1895 – 1898 (Berlin 1904) 297
31P. Karvonis, Les installations commerciales dans la ville de Délos à lʼépoque hellénistique, BCH 132 2008, 153-219; ders., Typoloqie et évolution des installations commerciales dans les villes grecques du IVe siècle av. J.-C. et de lʼépoque hellénistique, REA 110 2008, 57-81
32M.-Chr. Hellmann, Quartiers ou rues? La notion de quartier économique spécialisé dans la monde grec. comparaison des données textuelles et archéologiques, in: Esposito – Sanidas a. O. (2012) 23-37
33Broughton a. O. (1959) 599f.
34St. Mitchell, Introduction, in: St.Mitchell – C. Katsari (Hrsg.), Patterns in the Economy of Roman Asia (Swansea 2005) xiii – xxxii

35Zu berücksichtigen sind folgende Forschungsprojekte – 1. Comparing regionality and sustainability in Pisidia, Boetia, Picenum and NW Gaul between Iron and Middle Ages (1000 BC – AD 1000). Uni. Leuven u. a. http://iap-cores.be/. 2. Archäologie vormoderner Wirtschaftsräume Uni. Bonn/Köln http://www.wirtschaftsarchaeologie.de/ 3. The Oxford Roman Economy Project http://oxrep.classics.ox.ac.uk/ 4. Structural Determinants of Economic Performance in the Roman World. Uni. Ghent http://www.rsrc.ugent.be/sdep 5. An Empire of 2000 Cities. Urban Networks and Economic Intergration in the Roman Empire. Uni. Leiden http://www.hum.leiden.edu/history/research/projects-umw/erc-an-empire-of-2000-cities.html

2015년 6월 4일 목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0.2.

포룸 로마눔은 시청 광장과 같은 공공 장소이다. 엄밀히 말해 이곳은 구릉과 구릉 사이에 위치한 쓸모 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구릉에 위치한 부족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한 후 점차적으로 공공 장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허허벌판에 가까웠던 포룸 로마눔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각종 공공 건축물이 들어섬으로써 수도 로마의 중심부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상전벽해를 경험했던 포룸 로마눔에는, 오늘날의 시청 광장과는 다르게, 로마의 정치, 경제, 문화적 역학 관계가 건축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도 로마 내에서 포룸 로마눔이 갖는 이러한 상징적 의미 때문에 필자는 포룸 로마눔을 선택하였다. 그 상징적 의미는,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로마와 로마 이외의 정치 세력과의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수도 로마의 포룸 로마눔은 지중해 전체의, 로마 대 비로마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지중해 전체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수도 로마의 포룸 로마눔을 알아야 할까? 극동 아시아의 소국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다. 몰라도 일상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교양 운운하면서 고상한 척 할 마음 또한 없다. 다만 로마의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옥타비안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이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쳤던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악티움 해전과 연관된 또 다른 역사적 사실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아우구스투스의 보수 반동 정책, 안토니우스의 친동방 정책,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전선, 이집트식 신격화 수용 등), 이 사실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질 때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로마의 역사와 사회를 제대로 알아 기존의 역사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을 수 있다. 그 인식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질 것이다. 사유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라는 미셀 푸코의 말처럼 매일매일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아마츄어가 아닌 프로, 즉 전문가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