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화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4.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1901128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방치된 일명 데세날리안 decennalia 부조. 뒤에 보이는 개선문이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현존하고 있는 셉시무스 세베루스 Septimus Severus 개선문이다






기둥의 밑받침을 구성하는 정사각형을 상상해볼 수 있는데, 각 면에는 4가지 주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가지 주제의 4가지 양상이 표현되어 있다. 첫째 면에는 1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인 행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토가(로마 귀족들의 공식 의상)을 입은 원로원 회원과 황제가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둘째 면에는 정중앙의 제단을 두고 황제가 원로원 회원를 배석한 채 향불을 피우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향불을 피우는 황제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 있고, 황제 정면에는 뽀족한 투구를 쓴 국가 제사장, 그 옆으로 벗거벗은 채 투구를 쓰고 서 있는 전쟁의 신, 그리고 황제 뒤편에는 원로원을 상징하는 토가를 입은 귀족, 끝으로 맨 오늘쪽에는 기원후 3세기 이후 로마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태양의 신 - 태양 빗살이 퍼지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 이 배치되어 있다.  셋째 면에는 오랜 정치적 혼란을 신에게 속죄하려는 의미에서 쓰일 제물들 (소, 양, 돼지)이 화려하게 장식된 채 제단으로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중요한 면은 바로 네번째 부조이다. 네번째 면에는 두 명의 빅토리아가 방패를 들고 있고, 그 방패 아래에는 두려움 가득한 얼굴과 몸짓의 피정복민이 무릎 꿇은 채 방패 쪽으로 자비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 기단의 연대 측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방패에 쓰여진 글귀이다.

casearum decennalia feliciter (카이사르 즉위 10주년을 축하합니다)




둘째면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10770




셋째면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111




첫째면과 넷째 면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1460018 (16세기 중반의 스케치)





넷째면 출처 >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4115


디오클레치안은 포룸 로마눔과 로마 주요 지점의 수많은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었다.예를 들어 원로원의 회의 장소인, 포룸 로마눔 북서쪽에 위치한 큐리아를 대대적으로 개보수했고 엄청난 규모의 공공 목욕탕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건설 작업은 어떤 실용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반면 선임 황제 트라얀이 세웠던 기둥과 비슷한 기둥들을 포룸 로마눔에 5개 이상 설치했다던지, 기둥들 꼭대기에 대소황제와 수호신 쥬피터를 세웠다던지, 각 기단 외벽에 자신의 의도 - 평등(에이꾸알리테스aegualitas),형제애(프라터니타스fraternitas),그리고 단결 (콘코르디아concordia) - 를 보여주는 부조로 설치했다는 사실은, 디오클레치안 자신의 목적과 분리해서 생각해볼 수 없다. 기원후 1-2세기 황제 포룸(일명 임페리얼 포룸)이 만들어진 이후 공식적인 정치적 종교적 장소로 활용되었지만, 디오클레치안이 포룸 로마눔에 정치적 기념물을 세웠다는 것은 포룸 로마눔이 기원후 4세기 초반에도 중요 정치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었음을 말해준다 (큐리아와 임페리얼 포룸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겠다)

우리는 포룸 로마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왜 로물루스 레무스 시대의 포룸 로마눔부터 시작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디오클레치안의 행적을 통해 대답해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디오클레치안은 포룸 로마눔이라는 공간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디오클레치안 이후 몇몇 황제들이 포룸 로마눔에 정치적 기념물을 세웠지만 그것은 기존 기념물을 새롭게 단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 이외의 군사 행정 도시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도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 오늘날의 이스탄불 - 이다. 디오클레치안 이후 정치적 선전 선동 프로그램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도시들에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에 비례하여 수도 로마 그리고 포룸 로마눔이 갖는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수도 로마가 갖는, 그리고 포룸 로마눔이 갖는 공간적 의미의 변곡점에 놓였던 인물이 바로 디오클레치안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스팔라토의 퇴임궁전
크로아티아 해변 스팔라토 (오늘날 이름 스필리트)에는 디오클레치안이 퇴임 후 거처했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기원후 295년부터 305년까지 건설되어졌던 이 궁전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스팔라토 궁전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로 160 세로 190 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형태의 이 궁전에는 황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무덤들, 회랑으로 만들어진 산책로, 쥬피터 신전, 주요 군사 행정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스팔라토 궁전에는 외부의 적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방어 시스템, 예를 들어 감시대, 성문, 근위대들의 숙소, 식량 창고 등이 구축되었다. 군사 진지를 방불케하는 퇴임 궁전은, 중세 시대 산꼭대기에 위치한 영주의 성을 연상케한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이한 권력자들은 기원후 1-2세기 황금시대와는 달리, 자신의 거주지를 폐쇄적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디오클레치안의 스팔라토 궁전은 외적 방어와 내부의 치안 부재 대비가 결합된, 어찌보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최고 권력자 주거 형태라 할 수 있다. 군사, 행정 도시들인 마일란드, 트리어, 테살로니키(그리스) 같은 곳에서도 스팔라토 퇴임 궁전과 비슷한 컨셉의 대소황제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신전, 극장, 원형 경기장, 공중 목욕탕, 황제 가문을 위한 무덤 등이 견고한 성곽 안에 통합되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들 거주지들이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발굴되지 않았음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디오클레치안의 스팔라토 궁전을 통해 테트라키 시대 황제들의 도시가 어떤 개념 속에서 설계되었는지를, 후기 고대와 중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거주지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여 변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팔라토 궁전 내 앞마당의 모습. 건축용어로 페리스틸 peristyle 로 불린다. 페리peri는 둘러싼, 스틸style 은 기둥을 뜻하는데, 함께 살펴보면 기둥으로 둘러싸여진 장소를 의미한다. 아쉽게도 로마 시대 이후 중세 시대 여러 장소에서 개보수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디오클레치안 시대 원형 자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193198


위키피디아 항목 diocletian's palace https://en.wikipedia.org/wiki/Diocletian's_Palace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