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말기 - 더 정확히 말해 로마가 제국이 된지 200여년이 지난 - 기원후 3세기 동안 로마 제국은 안과 밖에서 엄청난 위기를 경험했다. 로마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놓고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지금도 논의하고 있다. 19세기 계몽주의 시대 로마를 연구했던 이들은 지배 계층의 도덕적 해이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에드워드 깁번의 의견). 하지만 19세기를 거쳐 20세기로 넘어서는 동안 로마 제국 권력 구조의 내재적 취약성에 그 원인을 찾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쉽게 말해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혈연으로 승계되지 않고 로마 원로원 내에서 적절한 귀족을 선택, 추대되는 과정이었는데, 선출된 황제의 권력 정당성은 황제로서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확립되었을 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해 군사적 업적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그리고 로마 제국 내 사람들 (시민과 비시민을 포함한)의 먹고 자고 입는, 일상 생활을 잘 관리하여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능력 있는 그리고 존경 받는 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권력 중심이 확고해지는 과정이 원할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로마 지배층은 균열될 수 밖에 없었고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양상을 맞이하였다. 도덕적 해이, 권력 구조의 취약성과는 별도로 일부 학자들은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경제 정책의 실패, 이민족 침입이라는 요소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민족 침입은 로마 공화정 성립 이래 크기를 달리하고 끊임없이 발생했었고, 필자의 견해로는 적어도 기원후 3세기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만한 큰 패전을 로마는 겪지 않았다). 극히 일부분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위기 원인을 한 두개의 요소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 없다면서 앞서 말한 사항들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혼돈의 시대였던 기원후 3세기, 제국의 곳곳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정확히 말해 변방에서 혹은 수도 로마에서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은 대대장, 군 사령관 혹은 친위대장들이 스스로 황제라 부르면서 권력 기반을 군사적으로 뿌리내리려 했다. 세베루스 알렉산더 (기원후 235) 사후 근 70년 내지 80년 사이 40여명의 황제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휘하 군단병, 용병들 그리고 민병대들을 이끌고 제국 곳곳에서 서로 충돌했다. 로마 내 지배 계층들도 (공화정 시기부터 자리잡았던 명망가 귀족들, 제국 성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귀족, 돈 많은 상인들, 고위급 관리 등) 권력 구도가 수시로 변함에 따라 사분오열되었다. 정치적 상황이 이리 불안정하니 경제라고 잘 될리 없었다. 제국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 구조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징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전비 확충과 군단 유지를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주조하였고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로마 제국 내 일부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 자체를 포기하고 물물교환 시스템으로 회귀하였다고 몇몇 학자들은 보고 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고 세금 징수가 가혹해지자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는 곧바로 세수 결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로마 제국 내 사회 시스템이 취약해지자 기원후 2세기까지 비교적 잘 방어해왔던 이민족들이 국경선을 넘어서는 일이 잦아졌다. 라인강-도나우강 방어선을 넘보았던 게르만족들과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언저리(이곳은 강이 아니라 사막이 국경선 역할을 했다) 사사니안 왕국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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