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2일 월요일

포룸 로마눔, 천년 제국의 심장 1.2.

디오클레치안이 살았던 시기 역시 험난한 때였다. 그 역시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황제 참칭자들 중 하나였다. 황실 친위대 대대장에 불과했던 그가 막강한 정적들을 물리쳤던 원동력은, 어쩌면, 그의 탁월한 군사적 지휘 능력이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와 맞섰던 정적들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군사적 무능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원후 285년 군단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지 불과 1년만에 온전한 권력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상처 뿐인 영광. 왜냐하면 그의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제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타 황제들 혹은 황제 참칭자들과 다른 점은, 제국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만한 비젼과 추진력이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인 스스로의 정치 철학에 의해서이든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그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휘하 부하들이나 자문역을 하던 귀족들의 의견을 따른 것이든 그는 제국의 형태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행했던 정치, 경제, 군사, 행정적인 개혁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다. 다만 포룸 로마눔과 관련지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시도했던 권력 분할 정책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제국이 황제 한사람으로 다스려지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 그리고 계속되는 이민족 침입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 시스템을 두 명의 황제 체제로 바꾸었다. 자신을 포함하여 두 명의 황제 (이름하여 아우구스투스)를 권력 구조의 최상단에 두었고, 각각의 아우구스투스마다 소황제 한명씩을 (이름하여 카이사르)를 배치한 권력 형태를 도입했다. 이러한 권력 분점 형태를 우리는 테트라키 (테트라는 라틴어로 4, 아키는 지배를 의미한다)라 부른다. 대-소황제가 짝을 이루어 제국의 동쪽과 서쪽을 맡았고, 행정 조직 관리와 이민족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다. 어찌보면 대-소황제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만한 공간적 거점이 탄생되는 것은 당연할 일이리라. 로마를 제외한 속주 대도시가 군사적, 행정적 중심으로 탈바꿈하였는데, 예를 들어 독일의 트리어, 이탈리아 북부 마일란드, 터키 북서쪽의 니코메데이아, 시리아의 안티옥 등이 그것들이다. 디오클레치안의 테트라키는 지중해 도시 역사상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왜냐하면 인구 백만의 도시 로마가 제정 성립 이후 지중해 내 도시들 중 유일무이한 대도시였던 반면, 테트라키의 성립 그리고 그에 따른 군사적, 행정적 거점 도시의 융성은 수도 로마가 갖는 도시적 의미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후기 제정 이후 중세 시대를 넘어오면서 트리어, 마일란드, 니코메데이아, 안티옥 같은 도시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았던 점을 상기해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개선문. 

포룸 로마눔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한 개선문. 자세히 살펴보면 콘스탄틴 개선문은 기원후 4세기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원후 2세기 시절 건축물의 일부를 재활용하여 만들어진 짜집기의 것이다. 기원후 4세기 초반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건설업 자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기원후 2세기 "훌륭한" 황제들의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 콘스탄틴 개선문은 로마에 세워진 마지막 개선물이며, 기원전 2세기 예술 양식과 기원후 4세기 예술 양식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출처: http://arachne.uni-koeln.de/item/marbilder/5035972 (독일 고고학 협회와 쾰른 대학에서 공동으로 만든 사진 데이터 베이스에서 따 옴 www.arachne.uni-koeln.de)



다시 디오클레치안과 포룸 로마눔을 살펴보자. 기원후 303년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경 방어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테트라키 시스템이 도입되어 고착화된 지 10년이 되자 디오클레치안은 자신이 지명한 1명의 대황제, 그리고 2명의 소황제를 로마로 불러들여 권력 장악 20주년, 테트라키 성립 1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었다. 어떤 순서로 어떤 내용의 행사가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 로마 시민들에게 현금을 뿌린다던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경기가 열리거나 개선 행렬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공화정 시대 이래 정치적 선전 선동이 이루어졌던 유일한 공간, 포룸 로마눔이 10주년 기념 행사의 중심축임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루어진 포룸 로마눔에 어떤 종류의 기념물이 세워졌을 것임은 상상해볼 수 있다. 어떤 기념물가 세워졌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기원후 312년 당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지배하였던 이는 막센티누스였다(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 그는 이탈리아 바깥의 황제 참침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원로원과 여타 황제들의 중재 노력을 거부한 그를 정복하기 위해 콘스탄틴, 그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선 해가 기원후 312년이었다. 수도 로마 북부에서 벌어졌던 단 한번의 전투, 밀비안 전투 - 콘스탄틴이 이 전투 직전 꿈에서 십자가와 승리의 확신을 계시받았고,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콘스탄틴의 기독교 포용 정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계시 자체의 신빙성도 없을 뿐더러 문헌 자료들은 상반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많다) - 에서 막센티누스를 물리친 콘스탄틴은 로마 입성 후 원로원으로부터 콘스탄틴 개선문을 선물받았다

위키피디아 기사 (콘스탄틴 개선문) https://en.wikipedia.org/wiki/Arch_of_Constantine


개선문 외부 벽면에는, 여느 개선물과 다름없이, 화려한 문양과 황제의 치적을 묘사하는 부조들이 장엄하게 가득차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콘스탄틴이 로마 입성 후 원로원 및 시민들에게 환영받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장소가 포룸 로마눔임을 알 수 있는데, 그 근거는 격자 형태의 구조물, 즉 로스트라이다. 포룸 로마눔 서쪽에 위치한 로스트라는 공화정 때부터 정치인이나 황제들의 중요 연설 장소로 사용되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로스트라와 그 위 인물들 너머 뒷배경이다. 배경으로 묘사된 양쪽 가장자리 건물들 사이로 기둥들이 나열되어 있고 각 기둥들마다 인물이 세워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기둥들이 디오클레치안이 세운, 권력 확립 20주년이나 테트라키 확립 10주년 기념 기둥들이며, 수호신 쥬피터 상을 중심으로 2명의 대-소황제가 오른쪽, 나머지 2명의 대-소황제가 왼쪽에 배치된 형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콘스탄틴 개선문 북쪽 부조 중 하나. 소위 아들로쿠치오(adlocutio) 부조 . 아들로쿠치오라는 말은 황제나 중요 정치인의 대중 앞 연설을 의미한다. 황제를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배치된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정중앙에 위치한 황제에 집중되어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rch_of_Constantine#/media/File:Arch_of_Constantine_forum_friez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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